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전교 10등 하던 아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전교 1등을 했다. 목표하던 대학을 상향해서 서울대에 마침내 합격한 아이를 당연히 칭찬할 수 있겠다. 이번엔 전교 100위권 아이다. 한 학년이 10개 학급 정도의 학교이니 반에서 10등 하는 아이다. 충청권 대학에 겨우 갈 수 있겠다고 했는데 2학년부터 각성했는지 공부에 몰입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다. 그저 경기도에 있는 대학의 그나마 알찬 학과에 입학했다. 이런 경우에 우리 사회의 평가는 어떨까. 그래도 현실적으로 서울대학교에 간 아이와 수도권 대학에 간 아이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거라고 묵인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각자의 입장이 다른 성취인데 그걸 어떻게 비교하느냐고 회피할 것인가. 문제는 후자의 수도권 대학에 합격한 아이에게 어찌 전자의 서울대 합격한 아이만큼의 찬사가 진심으로 발현할 수 없느냐라는 사회적 인식의 고착에 있다.
처지를 만족하라는 얘기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취제 같은 당부라고, 어차피 세상의 위계는 정해져 있기에 그런 달콤한 위로에 방심하면 안 된다고, 사람들은 경고한다. 그러나 저 위의 경우는 결코 처지에 만족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행한 과정에 집중해야 함을 말함이다. 서울대에 간 아이를 칭찬할 수 있는 만큼 수도권 대학에 들어간 아이의 성취도 같이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희망이 있는 세상이다. 특히 학교에서의 평가라면 더더욱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해가 갈수록 그런 평가에 인색하다.
국가별 대항전으로 가보자. 대한민국은 1959년 국내총생산(GDP) 19억 달러, 1인당 GDP는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우간다, 토고와 함께 국가 순위 밑바닥에 있었다(유시민, 나의 한국 현대사). 그러나 60여 년이 지난 지금, 2025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3만 6,624달러로 인구 5천만 이상의 국가 중에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6번째 수준에 이른다. 무려 일본은 2024년부터 우리 다음에 있다(한겨레신문, 2025.3.6.). 경이로운 위상의 변화이다. 후진국이라는 말, 개발도상국이라는 말, 그것도 모자라 중진국이라는 말이 무색한 당당한 선진국의 반열이다.
하지만, 익히 알려져 있듯이 경제적 성취에 걸맞지 않게 사회 불안과 불만족의 여러 지표가 유난히 높은 건 급하게 성장한 우리나라의 아픈 모습이다. 천천히 발전했더라면 성장에 따른 부작용을 관리할 여력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괜찮은 모습이었으리라 예상하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급하게 발전했기에 지난날의 아픔에 관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어서 훨씬 만족도가 높고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분명한 건 우리 사회가 20세기 이후 전 세계 어떤 곳과 비교해도 가장 독특하고, 역동적이며, 긴장도가 높은 사회라는 사실이다. 극한의 경쟁이 있지만 유사시엔 특별한 연대감이 작동하는 사회, 타인에게 무심하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하지만, 갑자기 어떤 계기가 발동하면 더할 나위 없이 서로를 위하고 돕는 태세 전환이 빠른 사회, 군부 독재, 민주화, 대통령 탄핵, 계엄, 그리고 다시 탄핵의 과정을 초고도 압축 기간에 겪는 진정한 매운맛의 사회이다.
긴장도가 높고 안정적인 삶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취할 선택들은 많다. 주택 구입으로 대표되는 자산 축적을 포기하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노력을 포기하며, 결혼을 포기한다. 그것들을 대표하는 가장 큰 상징적 포기는 바로 출산의 포기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나라, 달리 말해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가 지금의 대한민국인데 출산율 저하로 경제·산업적인 부분만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도 미래에 희망이 없어진 것인지를 따져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 한편으론 출산율 저하로 학교에서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부모들의 민원이 늘고 이상현상이 많아지는 것도 그렇다. 2023년 한 학교에서 선생님이 목숨을 던진 사건이 벌어지고 우리나라에서도 ‘몬스터 페어런츠’의 문제가 대두된 것 역시 달리 보면 저출산의 영향이다. 자녀를 한두 명만 나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포기하는 행위를 애써 행한 담대한 부모들이 자신의 결정에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극심한 무게감에서 비롯된 행태들이다.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기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들, 그래서 불안이 높은 부모들에게는 좌고우면 할 여유가 없다. 자식에 대한 무한 사랑은 거부할 수 없는 지상 덕목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한 가정의 아버지 K가 떠오른다. 그는 풍족한 살림을 일구려고 밤낮없이 일했다. 고된 노동과 노력으로 가난을 면하고 어느덧 어깨가 으쓱한 중산층이 되었다. 그러나 K는 다른 중산층처럼 사는 법을 모른다. 어려울 때와 비교하면 가진 돈이 많고 사람들의 시선도 좋아졌는데 예전처럼 식구를 닦달한다. 돈을 쓰면서 처지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며 우쭐하고, 생색내기를 좋아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처와 아이들이 조금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려 하면 그럴 돈이 어디 있느냐고 역정을 낸다.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와 일을 하고 싶다며 그 일이 많지는 않아도 사는데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의사, 변호사가 아니면 때려치우라 말한다. 남들이 볼 때만 화목한 척하고, 처자식과 따뜻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늘 식구들에게 미래의 불안을 말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러니 자녀들은 나중에 결혼할 의향이 없다. 아이를 낳을 생각은 더더욱 없다.
지난 시절, 한 아버지는 아이가 핸드폰을 사달라는 요구에 형편이 어려워 그걸 못 사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좀 참으라고 했더니 아이가 자기만 빼고 다른 애들은 다 갖고 있다고 해서 무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의 핸드폰은 애니콜이니 걸리버니 하는 pcs 기종이었다. 얼마나 오래된 얘기인가. 이젠 몇 필파워 하는 패딩에 등골이 휘는 브레이커와 같은 얘기마저 옛날 일이 되었다. 어느덧 자녀에게 관망하는 여유는 사라졌다. 부모의 불안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가되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어린 아이가 떼를 쓰면 무시하고 딴청을 피우라고 했다. 아이는 제풀에 지쳐서 더는 자기 행동이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오히려 애가 괜찮다는데 아이보다 더 불안해하는 부모들에게 조금은 자녀를 관망하고, 객관화하는 노력을 갖추길 권한다. 그럴 때 비로소 아이는 제 발로 걷는 힘을 키울 것이고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을 이겨낼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신학기를 맞아 아이들이 각자의 소개를 적은 포스트잇을 커다란 나무 그림에 붙이는 활동을 한다. 갓 입학한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자기 소개를 적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을 붙인 나무 그림은 얼마간 학급에 전시되어 공간의 일부를 차지한다. 오늘은 한 남학생이 질문했다. “선생님, 나무 말고 하늘에 붙이면 안 돼요?” 나는 딴 곳에 붙이면 다른 아이들이 따라 한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녀석은 “그럼, 땅에 붙여야지” 하며 나무 아래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요 녀석이!’하는 괘씸한 마음이 발동했다. 바로 제지하려 했으나 무려 4년 전에 비슷한 경험이 떠올라 그러지 못했다. 그때는 오히려 아무 곳에나 붙여도 괜찮다고 했던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이 붙인 모습으로 이 아이는 수줍음이 많구나, 혹은 이런 점이 독특하구나! 하는 마음의 일부를 읽을 수 있었고 그런 점을 해당 학급 담임 선생님과 나누었었다. 지금의 나는, 아버지 K처럼 간섭하려 한다. 이런 활동의 작은 변수마저 탐탁지 않아서 불만이다. 그러니 수업이 불안해질 수 있다. 이 정도의 시도가 어때서! 이 정도 아이들이면 너무 행복하지 않은가! 더 바랄게 무어라고, 만족하지 않고 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우리 사회도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은 여유를 찾고, 지금까지 이룬 성취들을 인정하기를. 그리하여 언젠가 누림의 여유가 충만한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