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과거에 머물 것인가? 현재에 충실할 것인가? 미래를 꿈꿀 것인가?
진로 활동은 주로 미래를 그리는 일이다. 우리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삶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말들로 현실을 달랜다. 문득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해 본다. 우선 떠오르는 것들은 이번 주 로또 당첨 번호, 내일 상한가 칠 주식 종목 등이다. 속물이라고 놀려도 괜찮다. 어차피 상상이니까. 그러는 그대는? 반문하고 싶다. 조금 더 기간을 확장하면 11월 14일(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수능 문제를 먼저 보고 싶기도 하고, 미국과 우리나라의 향후 대선 결과도, 소중한 아이의 진학 결과도 알고 싶다. 그러나 미래를 안다는 건 마냥 축복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알아챈 로또 번호로 용케 당첨된 후 삶이 어떨지 확인할 수 있다면? 만일 당첨 여부와 상관없는 미래와 내가 개입해서 영향을 준 미래가 서로 다른 거라면 이 문제는 간단한 게 아니다. 먼저 확인한 미래는 평탄하고 잘 살았는데, 로또 번호를 확인하고 난 이후 미래는 암울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수십억을 얻고도 삶이 망가지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만한 겸양은 갖고 있지 않냐고 스스로 물어보면, 글쎄? 한 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던 내가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를 아는 능력이 생긴다면?’ 이란 질문은 제한을 걸어야 한다. ‘만일 10년 단위로만 미래를 아는 능력이 생긴다면?’ 정도로. 그래야 두려움 없이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10년 사이에도 먼저 알아버린 미래 때문에 어떤 일이 생길 진 모르는 일이다. 마냥 자신감을 느끼기엔 저 제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나 보다. 현재에 충실히 하라는 수많은 경구들이 있어도 충실히 하려고 애를 써본들 이 순간마저 과거로 덧없이 흐른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지나쳐버린 과거만 이어질 뿐이다. 확신이 서는 대상은 과거에 남는다. 그러나 그 과거도 모두가 동의하기 어려운 모호한 개념이다. 게다가 과거에 있던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다. 요즘 들어 그런 장면을 숱하게 목격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나라가 1945년에 독립을 했는데도 그때를 독립이 아니라 하고,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 동원됐는지 여부를 묻는데 ‘논쟁적 사안’이라고 말을 흐린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인지 말하기 어렵다고 하고 대한제국이 존속했다고 일제(치하)보다 행복했다고 확신할 수 있겠냐는 얘기도 한다. 과거에 대한 그런 입장과 믿음이 소수 의견이라면 우리나라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다. 그 소수 의견이 연일 주목을 받고 아예 권력이 되어버린 상황이니까.
개인에게 과거는 기억으로 남아 과장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더 그럴 수 있지만 어릴 때도 그런 현상이 있다. 예전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는 말을 들으면 개인에게 있어 영광의 순간은 지나온 날들이 전하는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친구가 자신이 어렸을 땐 더 놀라운 집중력을 갖고 있었다고 회상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는 초등학생 시절에 어땠다며 지나온 날의 위대함을 자랑했다. 실제 그 순간에는 그런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아이들과 상담하면서 과거를 떠올려 보는 데엔 어느 정도 보정 값을 주고 들어야 한다. 힘든 순간일지라도 아름다웠기에 기억으로 남는다.
앞서 말했듯 진로 수업과 상담은 주로 미래를 나눈다. 자신의 앞날, 미래 사회의 유망 분야, 변화를 위한 노력 등 아마도 학교에서 진로 활동보다 미래를 많이 다루는 시간은 없을 듯싶다. 물론 미래를 그리려면 당연히 과거로부터의 교훈이 필요하다. 개인에게는 지나온 날들을 통해 더 키울 것과 누를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야 하고 미래 사회의 예상은 역시 지나온 시대의 되새김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 친구들 말에 잘 동요하고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일을 싫어했다면 앞으로도 좀이 쑤셔서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할 수 있고 그렇다면 원하는 학업 성취와 멀어질 수 있다. 그래왔냐고 묻고 동의를 얻으면 그런 내담자의 특성에 맞춰 학업 계획과 공부 전략을 추천해야 한다. 미래를 바꾸려는 의지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지금 있는 내 모습에 대한 겸허한 성찰로부터 비롯됨이다. 상담은 그런 내용을 확인하고 새로운 제안이 이어지는 과정이다. 주의할 것은 아이와 상담 도중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해도 실천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일단 이렇게 해보자! 하고 약속했건만 며칠 뒤 다시 만나면 아직은 … 하며 머뭇대는 아이들이 있다. 아니, 대부분이 그렇다. 그 앞에서 나는 화를 낼 수 없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는 「백투더퓨처」 만한 게 없다. 두 번째 시리즈는 개봉한 해인 1989년에서 26년 뒤인 2015년을 배경으로 미래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에서 소개된 기술인 화상 통화, 벽걸이형 TV, 지문 인식 도어락, 특수 소재 섬유, 3D 기술, 증강 현실 등이 상당 부분 현실화하여 놀라움을 주었고, ‘염소의 저주’로 107년 동안 우승을 못 했던 시카고 컵스의 메이저리그 우승까지 그 이듬해에 현실이 되는 등 우리가 미래 사회를 그리는 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느낌을 준 결과였다. 영화가 그린 미래의 연도에 맞춰 2015년에는 많은 뉴스와 담론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벌써 9년 전 일이라는 게 놀라웠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기억이 못 따라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우울해졌다.
그러나 영화와는 달리 미래 사회의 전망을 말하는 건 현실적으론 너무 어려운 일이다. 과거로 돌려 ‘만일 그때 그랬다면’하는 말은, 지나고 난 결과를 알기에 쉬운 평가다. 흔히 하는 말로 ‘그때 그 일을 했더라면’, ‘그때 그것을 샀더라면’, ‘그때 그걸 하지 말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다 지나고 나니 알아낸 것일 뿐이다. 그 선택이 앞으로도 유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사람들이 제일 아쉬워하는 게 국내 최고의 기업인 ‘삼○전자’를 20년 전에만, 아니 10년 전에만 샀으면 하는 후회다. 참 쉬운 판단이다. 다시 20년, 아니 10년 전으로 돌아간들 지금과 같은 확신은 어려울 수 있다. 그 당시에 왜 그 기업을 샀어야 하나요? 라고 물으면 반도체 산업의 미래 전망 때문이라고 말한 들 그게 얼마나 호소력이 있겠는가? 흔히 ‘산업의 쌀’이라고 반도체를 만드는 저 회사가 망하면 우리나라도 망하는 거라며 설득하려 해도 완전하지 않다. 또 다른 ‘산업의 쌀’인 철강을 다루었고 공기업으로 시작해 망할 일이 없었던 ‘POS○○’는 10년 전에 샀더라면 지금 5% 손실 중이다. 20년 전에 샀다면? 현재 약 47% 수익 중이다. 무려 20년 동안 연수익 2.35%. 은행 이자만도 못하다. 물론 불과 두 달 전인 7월에는 10년 전에 산 가격에 약 111%가 넘는 수익을 보인 적도 있다. 10년을 기다렸는데 그때 미련 없이 파는 건 또 다른 절제와 통찰이 필요하다. 더 오를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지 않을 일이다. 미래를 예견한다고 섣부르게 덤벼선 안 된다는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다.
올해는 의대 입학 정원을 전년도에 비해 무려 50%나 증원한 약 1,500명을 더 뽑는다. 목표는 2035년까지 의사 인력 1만 명의 확충이다. 그런 와중에 이과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의 의대 지원 쏠림이 심하다. 상위권 대학에 잘 다니던 아이들이 재수의 반열에 뛰어들고 직장인들까지 진학 경쟁에 동참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하지만 아직은 고소득에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 각광받는다 하여 미래에도 그게 유지될지는 모를 일이다. 만일 지금의 소득을 벌지 못한다면 그만큼의 공부와 노력이 타당한 것인지 저울질하며 갈등을 일으킬 시점이 분명히 올 것이다. 손익 분기점을 못 넘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 받는 분야가 될 수도 있다. 군인, 증권사 직원, 언론인, 컴퓨터 공학자, 건축가, 한의사, 교사, 공무원 등 우리 사회에 작건 크건 부침을 겪은 직종이 꽤 많았던 점을 들어 예상할 수 있는 미래다. 미래가 불안하니 물들어 올 때 노 젓는 거라고 잘 나갈 때 더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뒤이어 선택하는 사람들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영원히 빛나는 분야는 없다. 소득이 높고 안정적인 직업을 추구하는 욕망을 비난하려는 마음보다는 적성과 흥미 그리고 일말의 희생과 봉사라는 가치 따위는 무시한 채 일률적으로 쏠리는 집단 몰개성에 대한 아쉬움과 국가 경쟁력을 고려한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인재 배치가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누구라도 한 번쯤은 지적할 수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저런 주장을 해 본다. 비록 아무런 타격감을 못 주는 미약한 목소리지만 이 정신없는 돌진에 작은 제동을 걸어보고 싶은 건 열심히 진로와 직업을 가르친들 다 무슨 소용이겠냐는 허탈함을 이겨내 보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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