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황희의 썰, 의원(醫員) 이야기 – 「의설(醫說)」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6.19 06:19 | 최종 수정 2024.06.19 08:16 의견 0

박황희(고전연구가)

조선시대 시인이요 다독가로서, 노둔한 사람으로 태어나 노력하는 사람의 표본이 된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의 문집 가운데 「의설(醫說)」이다. 오래전 나의 석사 논문에 발표하였던 번역문 가운데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의원은 병을 치료하는 자이다. 귀한 자나 천한 자를 따지지 않는다. 사람에게 병이 있으면 의원은 반드시 가서, 침의(鍼醫)는 침으로서 약의(藥醫)는 약으로서 치료하여 살린다. 이것이 옛날부터 항상 그래왔던 도리이다. 오늘날 현세에 이르러서는 귀한 자가 병이 나면 가서 살펴보고 침을 놓거나 약을 처방하지만, 천한 자가 병이 나면 가서 보지 않아 침으로 치료할 수 있는데도 침으로 치료받지 못하고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데도 약을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병이 가벼운 자는 더욱 심해지고 병이 심한 자는 죽음에 이르게 되어 의원으로서 생명을 구하는 도리가 사라져 버렸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醫,治病者也, 不計貴賤. 人有病, 病[醫]必往, 鍼醫者鍼, 藥醫者藥, 以生之. 此古之常然之道. 今至叔世, 貴者病, 往視之, 或鍼或藥, 賤者病, 不往視之, 可鍼不得鍼, 可藥不得藥. 以至病之輕者𠫷, 病之𠫷者死, 而醫之救生之道廢, 不得不慨者此耳.

과거에는 ‘의료의 수가’가 보장되지 않아서 빈부와 귀천을 따져서 치료비를 떼일 염려가 없는 사람에게는 가서 치료하고 치료비를 떼일 만한 가난한 자에게는 잘 가지 않았다지만, 오늘날엔 의대의 정원을 늘려 자신들의 이권이 줄어들면 환자의 진료를 거부한 채, 의사들이 단체로 파업을 하기까지 한다. 환자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집단이기주의의 발호일 뿐이다.

전공의의 선택마저도 자기의 적성이나 사명이 아니라 오직 돈과 직결되어 있다. 외상을 치료하는 ‘외과’와 출산을 돕는 ‘산부인과’는 돈이 안 되는 까닭에 의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돈이 되는 ‘피부과’와 ‘성형외과’는 지나치게 많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겠다는 이유가 오직 안정적인 돈벌이에만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환자 수가 60만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강남을 찾은 외국인 환자 수 역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데, 이들 중 70% 이상은 피부과와 성형외과 환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에만 피부과와 성형외과가 2천 곳이 넘는다는 소리도 들린다.

‘판사(判事)’나 ‘변호사(辯護士)’, ‘의사(醫師)’ 등의 직업에는 모두 ‘사’ 자가 들어간다. 그러나 판사의 ‘사’ 자가 관직이나 벼슬의 의미를 나타낸다면 변호사의 ‘사’ 자는 자격에 의미가 있다. 판사와 변호사에게는 아무도 ‘판사 선생님’, ‘변호사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의사에게만큼은 반드시 ‘의사 선생님’이라고 호칭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교사(敎師)나 목사(牧師), 의사(醫師) 등의 ‘사(師)’자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선생님으로서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사회 전반에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사(師)’ 자를 가진 직업이 생명이나 정신적 가치를 담당하는 ‘스승’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사범(師範)대학’이라 하는데, 이때 ‘사범’의 의미는 공자가 제자 안회(顔回)를 두고 한 말로서 ‘학위인사 행위세범(學爲人師 行爲世範)’에서 나온 말이다. ‘학문은 남들의 스승이 되고, 행실은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사(師)’ 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두 가지 의무를 져야 한다. 첫째는 자신의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둘째는 지식을 전하는 스승으로서 ‘제자 양육’의 의무를 져야 한다.

예로부터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의 의술은 ‘기술(技術)’이요 ‘상술(商術)’이며, ‘권술(權術)’이요 ‘전술(戰術)’이 되어버렸다. 의대의 정원을 확대한다는 이유만으로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방기한 채 집단 파업을 하는 의사들은 이미 스승의 자격을 잃었다. ‘제자 양육’의 의무를 망각한 의사들에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사(師)’ 자를 쓰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위해서만 힘을 쓰는 자는 의료 기능인일 뿐이다. 또한 환자는 그들의 부의 축적을 위해 저당 잡힌 소모품이 아니다. 의료의 수가를 지불한 만큼 합당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의료 소비자이다. 요즘 의대 정원 확대로 인한 의료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느끼는 나의 생각이다. 오늘날 의사(醫師)는 다시 ‘의원(醫員)’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김득신의 「의설(醫說)」 원문 가운데 “인유병병필왕(人有病病必往)”은 “사람이 병이 나면 병은 반드시 간다”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는 문리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현존하는 『백곡집(栢谷集)』은 모두 필사본을 영인한 것뿐이다. 필자가 추정컨대 대개 필사본일 경우 같은 글자가 겹칠 때는 전과 같다는 표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위의 두 번째 ‘병(病)’ 자는 ‘의(醫)’ 자의 오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의 추정을 전제로 “인유병의필왕(人有病醫必往)”이라고 한다면, “사람에게 병이 있으면 의원은 반드시 가서”로 번역할 수 있어 문리가 순해지고 전체 문장에도 의미가 명확해진다. 내가 논문에서 주장했던 내용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설들을 너무 과신하지 마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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