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46. 달리는 아이를 달리 본 이유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5.17 05:46 | 최종 수정 2024.05.17 20:28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 교사)

“근데, 이 음이 베이스인가?” 대학 때 서클 형이 함께 음악을 듣다가 질문을 했다. 주로 록 음악을 들었던 당시에 악기별로 집중해서 듣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중에 베이스 소리를 찾는 질문이었다. 실제 거친 록 음악에서는 베이스 소리가 작게 묻히거나 일그러져서 찾아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게 베이스 소린지 어떻게 알지?” 형이 재차 묻기에 대답했다. “다른 베이스 소리가 안 들리잖아!” 그때 형이 아하~! 하고 신통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베이스 소리를 찾으려 집중하는 청각을 반대로 안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생각을 조금 바꿨더니 오히려 답이 명쾌했다. 역발상이 주는 성과였다. 살면서 때때로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거나 바꾸면 보이거나 들리지 않던 것이 나타나는 경우를 겪는다. 학교에서도 그렇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고등학교 진학과 고교학점제를 준비하라는 ‘진로연계 학기’가 생겨났다. 우리 학교는 일찌감치 그런 취지에 발맞춘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내가 부임하기 전부터 1학기는 1학년, 2학기는 3학년에 진로 수업을 배정해 놓아서 자연스레 그 시류를 타고 있다. 졸업하기 바로 전 학기에 고등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하게 될지, 어떤 과목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활동은 다양한 학교 유형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입학 후 적응에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진로연계 학기에는 대학 학과와 계열에 관한 설명도 함께한다. 대학 전공을 자신의 진로를 찾는 과정의 일부로 본다면 진로 수업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학과 또는 조금 범위를 넓혀 계열을 살펴보면 현대 사회의 학문과 산업 분야를 충실히 분류 및 정리해 놓은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시대에 맞게 새로 생겨나거나 개명 또는 사라지는 학과와 계열이 그런 확신을 준다. 예전 신문방송학과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로, 토목공학과가 ‘건설시스템공학과’나 ‘사회기반시스템공학과’로, 또한 컴퓨터공학과를 확대한 ‘소프트웨어학과’와 원예생명공학과를 심화한 ‘스마트팜과학과’, 예술과 디지털, 공학, 미디어를 융합한 ‘예술공학과’ 등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아이들의 관심 진로를 파악하기 위해 매년 약 5,000명을 뽑는 수도권 소재 한 대학의 계열과 학과표를 나눠준다. 웬만한 계열과 학과가 다 들어 있어서 주로 큰 종합대학을 수업에 활용한다. 그 표 안에서 관심 있는 분야를 있는 대로 표시하라고 한다. 그러면 벌써 학교에서 제일 고참이라고 중3 교실에서는 이런 반응이 꽤 나온다. “저는 관심 있는 분야가 하나도 없는데요?” 무기력이란 엔진에 시동을 거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그 영역에 빠진 건 아닌 상태라 생각하기에 그럴 수 있다는 여유로 아이를 대한다. 그 때 하는 제안은 좀 전하곤 다르다. “그럼, 네가 그 학교에서 돈을 주고 들으라고 해도 절대 가기 싫은 분야를 지워보는 건 어떨까?”, “예술대학의 무용학과는 어때?”, “아! 아니에요. 절대 싫어요!”, “그럼 태권도학과는?”, “어! 거기도 아니에요”, “그럼 호텔관광계열은?, 생활과학계열은?” 질문을 이어가니 한 아이는 외국어 계열의 일부 학과와 소프트웨어융합 계열의 컴퓨터공학과를 남겼다. 선택한 게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을 모두 지우고 남긴 것이다. 그럼 이 아무것도 관심 없는 아이가 적어도 자신의 현재와 가장 가까운 분야를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을 아이와 공유한다. 완전하진 않아도 아이와 함께한다는 고민이 의미가 있기에 의의를 둔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 나온 잘 알려진 대사가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좋겠어요.”라고 여행 가방을 잃어버린 손님 마사코가 말하자 식당 주인인 주인공 사치에가 한 말. “그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아이에게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계속 추궁할 때 그게 힘들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역발상은 이 영화에서 얻은 듯싶다. ‘자신이 열정을 바쳐 원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으세요’라는 주문이 얼마나 쉽지 않은 요구인지 반백 년을 살다 보니 이해가 가는데 지금도 아이들에게 강요할 순 없다고 본다. 오히려 생각을 바꿔 하기 싫은 일, 하기 싫은 공부만이라도 파악하게 하는 건 어떨까? 역발상의 성과를 기대하며 말이다.

실패가 끝이 아니라고, 진정한 위기는 곧 기회라고 많은 사례들이 역발상의 성과를 입증한다. 항공기 제작에 쓸 강한 접착제를 개발하려다 실패한 물질로 만든 ‘포스트 잇’이나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에서 나온 발모제 ‘프로페시아’가 그렇고 기승전결의 플롯을 깨서 10분 단위 기억 조각으로 재편한 영화 ‘메멘토’, 그리고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발달시킬 수 있다며 한때 유행했던 ‘뒤로 뛰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중의 대세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역발상의 흐름을 읽어야 하는 건 투자 세계에도 적용된다. 흔히 ‘싸고 흔할 때 사고, 비쌀 때 파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다수와 반대의 길을 갈 때 겪는 고독과 불안이 함께 한다. 지나고 나니 맞았다는 경험만으로는 쉽게 반복하기 힘든 영역이다. ‘911테러’, ‘구제금융(IMF) 시기’, ‘서브프라임 사태’, ‘코로나19’ 등 내 생애에도 입증된 사례이다.

역발상을 통해 감추어진 면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며칠 전 체육대회 때 경험이다. 전교생과 교직원이 지켜보는 체육대회의 꽃은 행사 말미의 이어달리기이다. 작은 운동장에도 정성스레 트랙을 만들어 준비하는 수고로움이 이 종목의 가치를 말해준다. 올해도 그랬다. 아이들이 남녀 번갈아 가며 바통을 넘겨주고 최선을 다해 달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이제 한참 십 대의 한 가운데에 있는 생명력 넘치는 신체가 달리는 모습은 인간이 달리기 좋은 존재임을 확인케 한다. 무언가 최선을 다해 맹렬히 향하는 그 순수한 지향성을 목도하며 나는 오랜만에 가슴 벅찼다.

이어달리기의 절정은 뒤처지던 선수가 선두를 탈환할 때다. 먼저 달린 팀원의 뒤처지는 결과를 이어받은 다음 주자가 우월한 속도로 앞선 주자들을 제쳐나갈 때 사람들은 가장 큰 환호를 지르며 열광한다. 마지막 주자가 결승점을 앞두고 그런 모습이 나오면 탄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나는 이때 거의 꼴등이 확실한, 이미 앞 주자들과의 격차가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마지막 팀의 바통을 넘겨받은 남학생을 바라본다. 모두가 주목하고 열광하는 선두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마지막 주자, 그곳을 바라보는 역발상은 오히려 진한 감동과 여운을 전했다. 이번 우리 학교 체육대회에서 이어달리기 경기 중 꼴찌로 뛴 대부분의 남학생은 이미 희박해진 우승의 가능성에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렸다. 마지막으로 달리고 있는 아이가 꼴찌인 이유는 그 아이 때문이 아닐 수 있지만 미리 뛴 주자들의 부족함을 만회하려는, 개인을 넘어선 팀을 향한 희생마저 숭고했다. 어느덧 ‘저 아이는, 무엇 때문에 저리도 열심히 달릴까?’라는 나의 천박한 의문이 부끄러워졌다. 생각을 달리하니 보이는 소중한 모습이었다.

이어달리기에서 그랬듯 우리 사회도 주목받는 분야, 그런 사람들, 그런 성과들만이 아닌 그렇지 못한 분야와 사람들이 달리 평가받고 대접받을 수 있는 역발상이 허용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 이해하고 배려해 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너무 심한 긴장과 압박 속에서는 늘 생각이 경직되기 때문이다.

출처 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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