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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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07:00 | 최종 수정 2024.03.0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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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플랜을 짜고 발표하는 동안에 건축예정부지의 인허가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 지역이 접경지역이라 군사동의 과정이 필요했고, 전(田)을 대지로 형질 변경하는 것이라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일을 총괄하는 건축사는 서울 소속이어서 시청 대관업무는 파주시 건축사에게 위탁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역 건축사를 보호하는 조치란다. 14개 필지를 한꺼번에 신청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1, 2차로 나누어 면사무소에 신청했다. 1차 신청 결과는 순조롭게 나왔고, 2차 신청을 하고 기다릴 때 성토작업을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토목설계를 담당한 측량업체에서 소개를 받은 토목 시공업체에서 견적을 받았다. 견적을 받자마자 견적을 검토할 여유도 없이 공사가 바로 시작되었다. 지역 건축사와 토목설계업자와 토목시공업자가 사업 파트너이어서 견적이 바로 계약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우리 측의 오더도 없이 자기들 일정에 따라서 성토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일의 주도권이 바뀐 것이다. 어? 이게 뭐지 하는 순간에 공사 일자가 통보되었고, 시작되었으며, 바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100여 대 분량의 흙이 20톤 트럭에 실려 와서 부려지는데 물차가 오지 않아 먼지가 일어나 마을에서 민원이 제기된 것이다. 현장감독 한 명이 배치되지 않았다. 소음, 분진에 대한 민원이 예상되고 견적서에도 신호수, 감독, 물차 등의 비용이 계산되어 있었음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항의가 있었고, 다음 날 감독자 한 명과 물차가 배치된 가운데 공사가 하루 더 진행되었다.
더욱 큰 문제는 현장에 들여온 흙의 성분과 질이었다. 부랴부랴 성토작업을 참관했던 우리 주민이 마을이 추구하는 이상과는 맞지 않는 흙이 들어왔다는 보고를 마을 주민들에게 했고, 몇몇 주민이 달려가서 확인해 보니 땅에서 판 황토나 일반 흙이 아니라 공사장에서 나온 혼합골재가 들어온 것이었다.
공사는 중단되고 대책회의를 열고 여기저기 관련업자나 지인들에게 문의하는 소동이 있었다. 그런 흙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의견부터 그런 흙을 받아 땅 아래에 묻고 좋은 흙으로 덮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라는 답변까지 그 대답도 각양각색이었다. 우리는 공사업자에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고 들어온 흙의 반출과 좋은 흙을 새로 들여올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우리 마을은 생태주의 건축을 지향하는 마을이니 그에 부합하는 흙을 들여오라는 요구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항의를 받은 공사업자의 반응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흙의 성분 검사확인서를 보여주면서 공사가 다 이렇게 진행되는데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헛소리를 지껄인다는 황당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인 방식이며, 지금까지 자기는 이렇게 일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이 마을이 생태 마을을 지향하는 마을이라는 것을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건축사에게 확인해 보니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건축사는 그에게 마을이 지향하는 바와 마스터플랜을 자세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거짓 해명하는 모습까지 그의 진심을 우리가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실해 보였다.
맞다. 우리는 건축현장의 현실을 1도 모르는 먹물들에 불과했다. 업계의 관행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들이 공무원을 상대하는 방식도 몰랐다. 건축현장에서는 건축주와 시공업자의 갑을관계가 바뀐다는 사실도 몰랐다. 집과 마을의 앞날에 들떠있는 이상주의자들에 불과했다. 돈을 더 주고라도 토목공사가 끝난 땅을 사라는 건축현장의 격언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건축에 대한 무지가 낳은 첫 번째 사건이었다. 첫 번째는 시작이라는 이야기다. 살다 보면 만나는 별 일들...
살다 보면 휘청할 때가 있지
어지럽거나 판단을 잘못하거나
갑자기 발목에 힘이 빠져
걷는 길을 놓칠 때가 있지
내동 잘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때로는 엎어질 때도 있지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
어찌 멀쩡하기만이야 하겠는가
나무도 늙어 허리를 꺾고
새들은 흔적을 지워 버리듯
사는 일이란 늘 생각 같지 않아
마음먹은 길 빈손으로
돌아 나오기도 하는 법
다만
미세한 떨림에 주의하고
속의 울림을 들여다보시게
살아온 길
한 번쯤은 찬찬히 돌아보시게
- 졸시, ‘살다 보면’, 시집 <어머니는 이제 국수를 먹지 않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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