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중학교 진로진학 코너 34. 초콜릿 상자 같은 인생의 희망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2.23 07:15 | 최종 수정 2024.02.24 21:34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헬리코박터균을 없애준다는 유산균 음료를 묶음 들이로 사서 먹었다. 경품 행사가 한참인데 겉 비닐을 뜯으면 안쪽에 당첨 여부를 알 수 있다. 두 번째 먹은 음료의 비닐을 뜯으니 ‘한 개 더’라는 표식이 보인다. 당첨이다! 어려서부터 이런 경품 행사에 몇 번 당첨된 적이 있었다. 어린이 잡지에 공모했더니 두유 큰 박스를 경품으로 받은 적이 있고, 백화점 행사에서 나름 큰 경품에 당첨된 적도 있다. 대학교 설명회 행사에서도 내가 뽑아서 함께 간 동료 선생님께 드린 번호가 2년 연속 고가의 가전제품에 당첨된 적도 있다. 이런 경우를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있을 테니 자잘한 경품에서는 나름 행운의 사나이이지 싶다.

아래를 보고 살아야지, 위만 보고 살면 어떻게 사냐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처한 현실에 만족하라는 의미일 테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일 게다. 아울러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하란 의미도 있을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뭐가 걸릴지 아무도 모르거든.” 선택이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삶의 우연성에 좌절보다는 건강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톰 행크스가 열연한 주인공 포레스트의 삶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 오래 남았다.

위만 보고 살 순 없지만, 사회에서 학교에서 주목받는 건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이루었기에 부러움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걱정과 근심은 있는 법. 학교 현장에서도 그걸 확인할 때가 있다. 작년에 상담한 중3 남학생은 전교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전통의 표현을 빌자면, 학교생활도 반듯하게 해서 많은 친구와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는 아이였다. 어느 날 교무실 문턱을 넘은 아이는 부산에 있는 한 영재고등학교에 합격했다고 말하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생명과학 분야에서 단성 생식과 관련한 논문을 써서 이 학교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했는데 같은 반에 일반전형으로 합격한 여학생이 수학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많이 부족한 게 아닌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상담을 통해 확인한 남학생의 수학 실력은 이미 보통 중3 아이들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상태였음에도 그동안 학과 공부에 몰두한 시간이 다른 아이들보다 부족할까 봐 입학 후 경쟁에서 뒤처질 불안감이 큰 상황이었다. 다른 집에서 보면 욕심이 끝이 없다고 부러워할 일이지만 아이는 내심 진지하고 심각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격려는 별게 없었다. 화학생물학부에 합격한, 그래서 연구 논문을 직접 쓸 정도로 공부의 자세가 되어 있는 본인의 모습에 자신감을 가질 것, 수학을 더 잘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건 그 친구의 장점으로 인정하고 긍정적 자극으로 삼을 것, 학교에서 합격시켜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자신의 합격을 자신감의 근거로 삼을 것 등이었다. 그리고 입학 후 학교 공부를 위한 준비 정도와 공부 방법이 궁금하고 걱정된다면 학교에 미리 전화하고 하루 체험학습을 내어 부모님과 함께 다녀오라고 권했다. 작은 할 일을 제안했을 뿐인데 아이는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이런 영재가, 이런 사소한 격려로도, 이리 좋아하나!’ 하고 나도 새삼 즐거웠다.

며칠이 지나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학교에 전화를 걸어 고민을 얘기했고, 학교 측은 그런 사정의 아이들이 이전에도 있었는지 재학 중인 선배를 연결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적극적으로 학교에 문의할 수 있게 조언해 준 나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영재학교에 간 아이의 이야기다. 영재성은 공부를 잘하는 다른 아이들과 견주어도 선천적인 부분이 많은 영향을 주는 영역이라고 본다. 어릴 때부터 비범함을 느끼게 하는 아이들이 있다. 학습과 창의의 영역에서 운이 좋게 태어난 아이들이다. 부모의 환경과 사회·문화적인 환경 등의 수많은 우연 가운데에서 한 가지의 행운을 얻은 경우다. 물론 다른 행운들이 겹쳐서 삶을 더 좋게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있다.

‘느린 학습자’라는 말을 들었다. 경계선 지능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지능 지수(IQ) 71~84점 사이에 있는 경우인데 지적 장애에 해당하는 70점 이하보다 지능이 높아 법적 장애로 인정받지는 않지만, 낮은 지능 지수로 인해 또래보다 정신연령이 더 낮고 학습 능력, 어휘력, 인지능력, 이해력, 대인관계 등에 어려움을 느낀다. 경계선 지능에 해당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2~14%라고 한다. 이 수치를 듣고 놀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국에 약 80만 명의 학생들이 있다는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대부분 잘 모른다. ‘연세춘추’의 2018년 기사(장애와 비장애 사이, 그 ‘경계’에 서다)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이들에 대한 낮은 이해도와 추가적인 업무로 인해 불편한 입장이고, 또래 집단에서는 따돌림 등 학교 폭력에 쉽게 노출되며, 직장에서는 의무 고용 대상(장애인)에서 제외되고, 국가적으론 병역, 취업 문제로 고통이 큰데 공적 지원은 전무한 상황이라 이들을 없는 존재, 즉 ‘투명 인간’ 취급하는 풍토가 있어 왔다.

전문가들은 경계선 지능인에게 최소한의 자립 능력이 있다고 보고, 적절한 교육을 받는다면 충분히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초기에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평균 지능 범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방치되는 경우에는 인지기능이 지적장애 수준으로 퇴행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초기의 개입과 맞춤형 교육이 필수적이다(한국일보 2021년 칼럼 ‘이지선의 공존의 지혜’). 그러나 이런 맞춤형 교육 역시 공교육의 지원이 부실한 탓에 가정의 형편에 따라 다르게 제공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또한 지원이 너무 없으니, 이들은 결국 의도적으로 IQ를 낮춰 장애인 판정을 받기도 한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이들이 선택한 슬픈 자화상(연세 춘추 해당 기사 인용)’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서도 고입이 어떻고, 대입이 어떻고 하며 매일 상위 몇 프로의 아이들만을 위한 세계에 젖어 있진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이 용어를 이제야 알고 공부가 힘든 아이들의 입장에 관해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된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인생의 수많은 우연이 우리를 즐겁게도 하고 힘들게도 한다. 특정 분야에서 누구도 원치 않았을 우연적인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역시 우연으로 일정 정도 혜택을 받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세계에 어떻게 생각해 봐도 당연한 ‘정의’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들에게, 일상의 권리를 내세우며 비난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025학년도 대입부터 의대 정원을 2,000명 더 늘린다는 정부의 계획이 나왔다. 벌써부터 이공계 우수 학생이 얼마가 의대로 쏠릴 것이며, 그리하여 해당 계열은 점수가 어느 정도 하락할 것이고, 이탈한 우수 인재들 없이 앞으로 국가 경쟁력을 어찌할 것인지 말들이 많다. 그러나 의대 정원을 5,000명으로 늘려도 2024학년도 수능 응시인원 44만 명의 약 1% 학생들이다. 그리고 오늘도 교실에서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수많은 학생이 잠을 잔다. 이런 뉴스와는 아무 상관 없는 대부분의 학생이 각자의 짐과 고민을 짊어지고 학교에 다닌다. 현실은 공부를 싫어하고 잘 못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 그리하여 새로 알게 된 단어를 통해 아이들에게도 위만 바라보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힘을 실어 격려해 주는데 위도, 아래도 없이 살펴야겠다고 한 번 더 다짐한다.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사진= Kevin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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