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철학, 노자 도덕경 산책 (44)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2.22 07:25 의견 0

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전 지수중학교 교장)

개인적으로 라틴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문득 50대 후반이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둔한 머리와 느린 배움 탓에 좀 체 진척이 없다. 올해로 만 6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라틴어 공부는 까마득하기만 하다.

오늘 저녁에도 라틴어 강의가 밴드(네이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피곤함과 게으름을 핑계로 빼먹고 말았으니 이번 생 안에 라틴어로 된 책을 줄줄 읽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기야 라틴어가 이미 사어死語인지라 활용에는 어느 정도 문제가 있지만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데 라틴어만 한 것도 없다.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멀고 힘든 여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동양의 수많은 성현들의 책에는 수많은 배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장자’나 ‘노자’는 배움에 대해 썩 좋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듯하다. 실제로 『장자』라는 책 속에 ‘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좀체 찾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배움’은 사람을 '도道'와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장자』 ‘덕충부’에서 ‘장자’는 ‘숙산무지’라는 인물을 통해 ‘공자’의 배우려는 자세를 비난한다. 여기서 ‘장자’는 ‘노자(담)’의 입을 빌어 ‘공자’의 배움을 이렇게 낮춰서 말한다.

피차기이숙궤환괴지명문(彼且蘄以諔詭幻怪之名聞 그는 또 수수께끼나 속임수 따위의 명성으로 소문나기를 바람.) 배움의 목적을 수수께끼나 속임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배움을 바라보는 ‘장자’의 시선이다. 당시 배운 자들이 만들어 놓은 혼란한 세상 탓일 것이다. 그 혼란의 원인에 '공자(유교)'도 크게 한몫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배움' 자체를 낮추는 것인지 아니면 ‘공자의 배움’을 낮추는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장자』 ‘어부’에서 은자隱者이면서 동시에 득도자得道者인 어부漁父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공자’의 모습은 배움을 좋아하는 ‘공문孔門’(유교)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칭찬받지만 동시에 그 배움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에 대하여 말하다. 이를테면 『장자』에서 말하는 배움이란 처세의 잔기술 정도로 본다. 다르게 표현하면 ‘장자’가 말하는 도道는 배움으로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노자’ 역시 『도덕경』에서 배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데, 도덕경 48장과 65장에 약간 언급되어 있다. 하기야 '도道'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도道' 이전 단계로 생각하는 '배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기는 하다.

“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학문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쌓아가지만, 도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도덕경』 48장 부분

'도道'는 사물에 대한 이해의 증가, 즉 배워서 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최소화하는 과정이다. 즉 ‘도道’에 이르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을 비워냄으로써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65장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로부터 조금 더 나아가는 이야기다.

"고이지치국, 국지적 불이지치국, 국지복.(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그러므로 ‘앎’으로 다스리는 것은 나라에 해가 되고, ‘앎’으로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이 된다.)" 『도덕경』 65장 부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智’의 해석이다. 『도덕경』 전체로 본다면 ‘지智’ 혹은 ‘지知’는 대부분 긍정적 의미의 개념이 아니다. 『도덕경』에서 ‘智’ 또는 ‘知’는 지도층이나 일반 백성이나 가능한 멀리해야 할 부정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즉 배움으로 인하여 얻어진 ‘지智’는 자잘하고 얄팍하여 단지 사물을 분별하는 ‘앎’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계산하여 약삭빠르게 처신하는 이기적인 ‘앎’이 노자가 생각하는 ‘지智’ 혹은 ‘지知’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방법이 되는 ‘배움’에 대한 시선이 좋을 수 없다.

문득 내 라틴어 공부는 어떠한가? 라틴어를 배워서 얻는 나의 얄팍한 이익은 무엇인가? 오로지 학문에 사용할 목적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정녕 그것뿐인가? 아무도 배우라고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 어떤 이익을 추구할 목적도 없지만 마음속 깊이 유리한 계산은 없는가? 타인에게 어려운 공부를 한다고 드러내려는 마음이나 그것으로부터 타인의 인정을 받아내려고 하는 마음은 위에서 말하는 계산과 약삭빠른 처신에 속하지 않는가?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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