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중학교 진로진학 코너 30. 시작의 추억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1.26 07:43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통상 광고에 쓰이는 문구를 카피라 하고 해당 브랜드의 개성을 설명하는 짧고 강렬한 카피를 슬로건이라 한다. 수많은 광고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을 가장 많이 흔든 카피와 슬로건은 바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그것들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로 기억한다. 그룹 ‘The Killers’의 배경 음악과 함께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의 모습과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인간, 그리고 좌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스포츠맨들을 오버래핑한 나이키 PR 광고의 첫 카피는 ‘Everything You Need Is Already Inside’였다. 그리고 그 광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의족 스프린터의 질주하는 모습에 나온 슬로건은 역시 1988년부터 써온 ‘Just Do It.’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일단, 그냥 시작하세요.’ 정도의 의미랄까. 그 슬로건을 보며 생각한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해왔던 수많은 일들은 곧 무언가를 ‘시작’한 것들이라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니 매일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우리는 무언가 시작하겠구나 싶다. 적응이 되어 쉽게 시작하는 일들이 일상을 만들 것이고 좀 더 큰 도전들은 시작할 때 그만큼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주저함이 클수록 인생의 경험치들은 적어질 테고 그런 후의 아쉬움이 미련과 후회로 남을지 모른다. 그래서 ‘Just Do It.’은 참 울림이 컸다. 나에게 그래왔고 아이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격려다.

지난날 시작을 하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있었나 돌이켜 본다. 그래도 시작한 일이 많이 떠올라서 잠시 뿌듯했으나 연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연상이라 여기며 이내 숙연해졌다. 때론 어떤 일은 시작하지 않아도 좋았을 일들이 있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정말 하지 않았을 일들. 그때 그 말은 시작하지 말았을걸, 그때 그곳에 가는 발걸음은 시작하지 말았을걸, 그때 그 행동은 시작하지 말았을 걸 싶은 일들이다. 이른바 정점투자의 달인에다 제일 좋아하는 놀이기구가 미끄럼틀이라고, 무언가 투자하는 순간이 늘 꼭지여서 친구들이 내가 무언가 팔고 싶다면 그때 사겠다고 농담할 정도로 돈을 불리는 데는 젬병이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떠오른 건 지금도 정말 시간을 돌리고 싶은 각종 투자의 시작들이다. 그 밖에 운명처럼 이끌려서 시작하게 된 일들도 많다. 교사가 되겠다고 사범대 원서 작성을 시작한 건 담임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뚜렷한 확신 없이 막연한 희망만으로 무언가에 이끌린 면이 더 컸다. 삼십 평생을 살던 지역을 떠나 현재 살고 있는 도시로 턱 하니 학교를 옮긴 일도 그렇고 진로 교사가 되겠다고 문득 대학원 면접 준비를 시작한 것도 그렇다. 소중한 친구들과 인연들의 만남을 엄청난 동기와 의지로 시작했다고 볼 순 없겠다. 그건 어느 정도 예측하지 못한 행운이라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운명처럼 시작했지만, 후회가 많은 일들도 분명히 떠오른다. 앞서 말한 각종 투자의 시작이 그러했고, 원치 않은 일에 얽매여 몇 날을 고민했던 일들이 그렇다. 나쁜 습관은 시작하기도 좋아서 결국 쌓이고 쌓여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 그 원망을 톡톡히 사고 있다. 뚜렷한 확신과 동기가 없이 시작한 것들의 향방은 어쩔 수 없었다고 위안으로 남겨두고 싶다. 되돌릴 수 없으니 말이다.

3월은 ‘시작’의 달이다. ‘처음처럼’, 새싹이 ‘트는(spring)’, 중학교 1학년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학교는 자유학년제 속에서도 1학기엔 1학년, 2학기엔 3학년에 진로 수업이 배정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 2학기에 중학교지만 제일 선배랍시고 늙다리 티를 내는 3학년 아이들을 겪은 후엔 신입생을 만날 새 학기의 기대가 커진다. 재작년, 14년 만에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을 만나고 느낀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중학교 1학년 교실은 새로운 출발의 강한 힘으로 충만한 곳이다. 첫 수업에 한 학기 동안 포트폴리오로 활용할 클리어 파일을 나눠주면 이때부터 아이들이 웃고 좋아한다. 비로소 학기의 시작이다. 작은 답변에도 잘했다며 쥐여주는 사탕에 연신 환호와 감사를 보인다. 자신을 알아가는 각종 검사와 설문에 진지하게 답변하고, 미래의 꿈과 희망을 고민하면서 마냥 신기해하며 기뻐하는 아이들을 대하면 때론 경건한 마음마저 생겨나곤 한다. 그래서 일제고사가 없으면, 석차와 경쟁이 없으면, 무언가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있겠냐고 미리 걱정하는 분들에게 어느덧 정착한 자유학년제의 중학교 1학년 교실을 진정 보여드리고 싶다. 물론 그 아이들도 하교 후 곧바로 학원 등으로 몰리긴 하지만 적어도 학교 내에서의 모습이 다른 점은 거듭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1학년의 자유학년제를 축소하여 한 학기만 실시하는 자유학기제로 바꿀 예정이다. 그럴 이유가 많다고 하지만 아쉬운 변화다.

수많은 시작을 떠올리니 그중에 가장 안전하면서도 후회 없는 건 무언가 배우는 것들이었다. 새 학기가 되면 아이들과도 함께 고민해 보고 싶은 주제다. 제목으로는 ‘살면서 시작했던 일 중에 의미가 있거나 좋았던 것들을 적어봅시다.’로 하면 어떨까. 아이들의 견해도 나와 같은지 확인하고 싶다. 그렇다. 모든 배움의 시작들이 지나고 보니 작건 크건 추억이 되어 뿌듯하고 무언가 남는다고 느끼게 한다. 예전부터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다고 착각해서 무료했던 대학 시절에는 화실에서 데생을 시작했다. 교사가 되자마자 먼 거리를 출퇴근하면서도 어릴 적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한때는 수영을 시작했고, 스쿼시를, 배드민턴을, 스포츠 댄스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무언가 배운 일들은 주로 30대까지 몰려있었다. 이후 10여 년은 술을 배우고 사람을 배우는 시간이었다면 지나친 변명일 수 있어 자중해야겠다. 많은 배움의 시작을 끝까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밀고 가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뽐낼 만큼 자신 있는 정도에 이른 건 없다. 그래서 이런 끈기 없음을 자책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낮은 문턱의 분야들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높은 수준은 아니라도 무언가 배우며 만든 경험 자체가 소중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배우는 걸 시작하는 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오랜만에 새로운 배움을 시작했다. 바로 본격적인 영어 회화 공부이다. 학창 시절부터 끄적거리기만 한 영어 공부로 아직 변변한 실력을 갖추지 못해 영화를 보던, 여행을 가던, 외국인을 만나던 나의 활약은 신통치 못했다. 그래서 친구가 소개해 준 가성비 좋은 화상 영어를 ‘시작’했다. 필리핀에 있는 선생님과 매일 화면으로 만나는 영어 공부를 쑥스러움과 부담 속에서도 일단 저질렀다. 그리고 위대한 ChatGPT voice의 혜택을 활용해 혼자서도 틈틈이 할 수 있는 훈련을 시작했고, 인기 있는 학습 앱도 깔아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작 자체만으로 무언가 큰 도전을 한 느낌이라 좋았다. 만일 이번에도 꾸준히 못 해서 별 볼 일 없게 된다면 어떨까? 그땐 아이들에게 얘기하듯 스스로 위로할지 모른다. 세상엔 끝까지 가는 사람 못지않게 완주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기에 중간에 좌절한다 해도 시작하는 걸 멈추진 말자고. 아직도 원하는 걸 시작하지 못한 사람 역시 아주 많다고. 그리고 일단은 시작해야 무언가 끝도 맺을 수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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