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1992년 봄 ‘서태지와 아이들’은 타이틀곡 ‘난 알아요’를 앞세운 대망의 1집을 내고 향후 10여 년간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도한다. 그룹의 리더인 서태지를 보며 사람들은 어디서 저런 인물이 나왔나 놀라면서 그가 서울의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고, 고등학교를 중퇴했음에도 독특하면서 심오한 철학으로 무장한 이른바 X세대의 표본이라고 추켜세웠다.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수사어를 동원하면서 마침 정보화 사회로 향하는 시류를 반영한 새로운 인물이라고도 평했다.

스포츠에는 2년 차 징크스가 있다. 화려한 데뷔 후에는 익숙한 슬럼프를 겪게 된다는 말인데 사실 그 이듬해에 슬럼프가 있건 없건 성공 뒤에 따르는 위기를 극복하느냐에 따라 큰 별이 되느냐 아니면 반짝스타(one-hit-wonder)가 되느냐로 나뉘게 될 일이다. 눈에 띄는 신인들이 꾸준한 활약을 했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쉽지만은 않기에 2년 차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한 신인들도 많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간 속에 잊혀졌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은 2집에서 국악과 테크노, 헤비메탈 사운드를 접목한 ‘하여가’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자신들의 앨범 중에서 평단의 호평과 가장 많은 판매고(220만 장)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둔다. 만일 누군가가 주목받는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제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면, 나는 그다음 그가 보여줄 퍼포먼스가 기대된다. 내가 좋아하는 건 화려하지만 덜 익은 데뷔의 모습이 아니라 아직은 새로움이 남아있지만 그 새로움으로 이미 연 큰 지평에 본격적인 날개짓을 할 그다음 동작이다. 여기엔 익히 생각나는 수많은 사례가 있다.

지금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아카데미 졸업 후 첫 장편은 향후 그의 영화 세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보여주는 단초인 ‘플란다스의 개’(국내 관객 수 10만 명)였다. 그 데뷔 영화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미 영화인들이 보여준 반응은 뜨거웠고,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큰 도약이 3년 뒤 그의 두 번째 장편 ‘살인의 추억’(국내 관객 수 525만 명)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2집)에서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인 대표적 사례이다. 코믹 영화의 각본가로 이미 명성을 쌓고 있었던 젊은 감독 이병헌은 영화 ‘과속스캔들’, ‘써니’ 등의 각색 작업에 참여했었고 20대 청춘 남자들의 우정과 웃음을 담은 ‘스물’로 메가폰을 잡는다. 흥행에도 어느 정도 성공(308만)을 하고 좋은 평가를 받은 신인 감독은 드디어 3년 뒤 그 당시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수인 1,6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을 성공시킨다. 비슷한 사례는 영화뿐만이 아니다. 해외 음악계에선 싱글 앨범과 정규 앨범이 혼재되어 있기에 딱 잘라 판단하긴 쉽지 않지만 전설적인 밴드 ‘Beatles’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I saw her standing there’, ‘Love me do’, ‘Twist and shout’ 등의 히트곡이 실린, 당시에 가장 빨리 녹음한 앨범(불과 16시간 만에)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정규 1집 ‘Please please me’의 성공 이후 그들 역시 이듬해 정규 2집 앨범 ‘With the Beatles’를 발매하였고, 이 앨범은 2년 동안 무려 100만 장이 팔려 영국 최초의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이후에 비틀즈가 낸 앨범들의 연이은 성공은 부연할 필요가 없겠다.

두 번째(2집)의 성공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그건 어쩌다 짠! 하고 나타나서 주목받는 게 아니라 오랜 노력과 연습의 축적 속에서 비로소 세상에 등장한 어떤 경이로움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본다. 진짜 신인은 그래서 해당 분야에서는 이미 신인이 아닐 수 있다. 대중이 인식한 공식적인 선언이 신인이었을 뿐 데뷔 이전에 들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 내공이 쌓여있어야만 롱런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두 번째 성공작이지만 그 작가들의 비범했던 데뷔가 관심이 많이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을 상담하면서 노력일까? 재능일까? 고민하며 지쳐가는 순간들이 있다. 많은 자료와 사례들을 보면 그리고 더 이상 희망 없는 ‘노오력’에 몰두하지 말라는 자조 섞인 세태에 빠져있다 보면, 결국 재능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건 아닐까 싶어 힘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문득 떠올려본다. 그렇다면 노력의 미덕은 무엇일까? 노력으로 어느 정도까지 성취하고 완성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랜만에 아주 많이 회자된 철학자 헤겔의 생각을 들어보련다. 바로 ‘양질 전환의 법칙’이다.

영광스러울 정도로 몸치인 나에게도 수영을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 호흡법을 배울 때는 일상에서 갈증을 못 느낄 정도로 수영장 물을 마시며 연습했다. 이게 언제나 가능해질까 싶다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동작과 음~파!가 맞아떨어지며 성공하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된다. 수많은 실패가 양으로 축적되어 순간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례이다. 우린 특히 운동할 때, 악기를 배울 때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 ‘아! 안되던 것도 수없이 반복하니까 되는 구나!’하는 느낌 말이다. 학업에서는 유독 외국어 공부가 여기에 잘 맞는다. 사실 언어는 습관이므로 공부로 접근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럼 흔히 말하는 암기 과목들은? 충분히 가능한 영역일 것이다. 끝까지 자신 없어 보이는 부분은 수학과 과학 분야다. 그러나 탁월하진 못하더라도 해당 분야에 전문적인 진로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적정한 점수를 얻기 위해선 그리 불가능한 영역도 아니라고 본다. 굳이 만점을 받진 못하더라도 차선책이 충분히 가능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속이 편해졌다. 이제 아이들에게도 또 해줄 얘기가 생겨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앞서 말한 스타들도 그런 오래된 신인들이었을지 조심스레 확인해 본다.

먼저 봉준호 감독은 남들보다 일찍 31세에 장편 영화 데뷔를 했다지만 군대에 다녀온 후 한겨레신문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영화 수업으로 본격적인 영화 공부를 시작했고, 이후 대학에서 영화 동아리를 만들고 1993년 16mm 필름으로 첫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그 후 한국 영화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1999년까지 충무로에서 조연출과 각본 등의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았다. 십여 년을 영화 공부에 매진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던 것이다. 이병헌 감독의 경우 원치 않은 전공으로 대학 생활을 의미 없이 보내다가 졸업 전에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시나리오에 재미를 느껴 현장 일과 시나리오 습작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29세에 ‘과속스캔들’로 각색을 시작했고 이후 수많은 단편 영화와 각색, 각본을 써오며 내공을 쌓아가다 드디어 36세에 첫 장편영화를 찍게 된다. 역시 짧지 않은 훈련과 노력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수 서태지는 말할 것도 없다. 고등학교를 중퇴할 정도로 일찍부터 음악 세계에 전념했고 몇몇 그룹사운드 생활을 거친 후 그의 집념과 재능을 발견한 빅 밴드 ‘시나위’에 들어가 4집 앨범에 참여하는 등 처절한 무명 시절을 겪었다. 별다른 성과 없이 밴드를 탈퇴하고 새로운 음악에 전념하던 그의 모습은 ‘당시에 어머니가 차려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면서 6개월간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랩 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는 전 매니저의 증언을 보면 헤겔의 ‘양질 전환의 법칙’을 보여주는 충분한 사례이다. 비틀즈는 말콤 그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일주일에 7일, 하루에 여덟 시간씩 무대에 서서 연주했던 거의 노예 계약에 가까운 그들의 함부르크 시절 무명 활동을 ‘1만 시간의 법칙’의 사례로 들 정도로 데뷔 전 이미 충분한 고생을 했었다. 큰 잎을 펼치기 전까지 땅속의 양분을 충분히 빨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훌륭한 데뷔가 무조건 후속 작품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을 수 있다. 재능과 적절히 만나면 그 성취는 훨씬 더 커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 노력 없이, 혹은 아주 적은 노력으로도 쉽게 큰 성취를 이룬 것 같은 사람들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을 통해 아주 작은 기량과 실력의 변화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 기억을 좋은 믿음과 자신감으로 삼아도 좋겠다. 진로 상담을 하며 오늘도 어떤 희망의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할까 고심 중이던 나에게 오랜만에 힘이 되는 생각들을 만났다. 이제 천대받은 노력의 신화도 어느 정도 복권해 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