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산맥은 명성 그대로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바람이 무척 거셌다. 바람 소리는 마치 가까운 곳에서 나는 총성銃聲과도 같았다. 뚱뚱하다고 고민했던 이도 피레네산맥의 바람 앞에선 한낱 종이조각처럼 가벼워진다. 등에 진 배낭과 사람의 체중을 합친 무게가 무색하게 몸이 바람에 휩쓸려 좌우로 왔다갔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꼭꼭 동여맨 모자가 끊어져 세찬 바람에 날아가 멀리까지 달려가서 잡아와야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피레네산맥의 바람 앞에 사람의 의지는 그야말로 무용지물無用之物. 연약한 박선생이 “배낭 안에 사과가 없었다면 나는 벌써 멀리 날아갔을 거야”라 농담해서 피곤한 중에도 모두를 한바탕 목청껏 웃게 만들었다. 그 커다란 웃음소리도 피레네산맥의 바람 소리 앞에선 새발의 피에 불과하였다. 피레네산맥에 뿌리내리고 목숨 붙이고 사는 키 작은 나무들과 수많은 들풀과 야생화들이 이 세찬 바람으로 인해 하루도 맘 편히 잠들 수가 없을 것만 같아 안쓰러웠다.

출발한 지 2시간 즈음 양말을 벗어 발의 땀도 식힐 겸, 강풍을 피해 바위 뒤로 숨었다. 우리는 신선생이 철저하게 준비한 네모난 깔개에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옹기종기 앉았다. 과도한 행군으로 발에 물집이 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2시간 간격으로 쉬면서 양말을 벗고 햇볕에 발을 말려주어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앉자마자 양말부터 벗기 시작했다. 열기로 가득 찬 컴컴한 운동화 속에서 꼼짝없이 갇혀 붉게 쪼그라들었던 발들이 햇볕을 받고 풍욕을 하면서 죽었던 세포들이 하나씩 하나씩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시원했다. 배낭에서 사과와 바나나를 꺼내 우적우적 씹으며 눈앞에 펼쳐진 창공의 풍광에 흠뻑 빠져들었다.

스페인의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피네레 산중에서 보는 하늘 또한 환상적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절반이 초록빛 들판이요, 절반은 드넓은 파아란 하늘이다. 그랬었지. 우리 어린 시절 보았던 하늘도 이토록 넓고 아름다운 창공이었지. 도시의 아파트 사이로, 높은 빌딩 사이로 보았던 회색의 조각하늘과는 천양지차다. 새파아란 하늘 위에 하얀 얇은 솜털 구름, 울창한 숲들에 둘러싸인 미지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 같은 뭉게구름, 둥글둥글 흰 강아지, 토끼, 양떼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뛰노는 것 같기도 한, 황홀한 구름들의 축제가 스페인 하늘의 곳곳에서 펼쳐졌다. 과연 어떤 예술작품이 이보다 더 현란할 수 있을까.

부엔 까미노Buen Camino! 한 무리의 순례객들이 쉬고 있는 우리 옆을 지나가면서 인사를 건넨다. ‘부엔 까미노’는 스페인어로 ‘좋은 여정’이라는 뜻으로 주로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희망과 축복을 전하는 인사말이다. 순례 중 가장 많이 듣게 되고, 하게 되는 말이다. 어느 땐 현지인한테도 '부엔 까미노'라고 얼떨결에 말하고는 뒤늦게 실수임을 알아차리고 우리끼리 멋쩍게 웃곤 하였다.

그렇지. 한가하게 풍광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8km 왔으니 앞으로 18km 더 가야 한다. 갈 길이 멀다. 이제 일어나 가야지! 시원해진 발에 다시 두툼한 울양말을 씌우고, 보통 사이즈보다 3치수 커다란 H트레킹화를 높이 들어 흙을 탁탁 털어낸 후 끈을 단단히 조여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