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문화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대중적으로 흥미있으먼서도 깊이 있게 풀어낸 이 책은 본래 동양 문화와 문명을 상징하는 <삼국지>에 이어 사실과가치 출판사의 ‘비평문고’ 세계의 고전 시리즈 02로 처음 야심차게 기획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이 워낙 방대한 작품인데다 전문적인 식견이 개울물처럼 얕은 보잘 것 없는 올챙이 연구자가 이 책을 완성하는 데는 그야말로 돌덩이 같은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공부의 어머니인지 그동안 부끄러움을 면하려고 번역본(한국의 ‘천병희’ 본)이나마 표지가 떨어져나가도록 보고 또 보고 가능한 대로의 국내외 관련 자료들을 끌어 모아 폭넓은 탐색-그 중에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와 W B. STANDFORD의 <THE ULYSSES THEME>는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하던 글쓴이의 좁직한 인식의 지평을 크게 넓혀주었습니다. 대체 고전적 저술의 중요성이라니-도 해보고, 다방면으로 서책도 보아오던 순간, 어느 때인가부터 물관에 물이 차오르는 꽃대 모양 나의 영혼의 물관에도 어느덧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서구문명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와 그들은 무엇이 같고 다른지, 가령 동양의 경우 여우 같이 잔꾀에 능한 조조曹操보다 도덕군자의 후예인 유비劉備와 그를 충직하게 따르는 사자형 인간인 관우關羽를 좋아하고-특히 지배문화는 무론 관우는 민중들의 문화로 신격화, 풍속화되었습니다-는데 비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만 보더라도 그들은 왜 사자 같은 아킬레우스Achilles형 인간보다 여우같은 오디세우스Odysseus형 인간을 더욱 선호하는지 등, 이것은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문화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글쓴이가 이미 <삼국지>를 통해 동양문화와 문명 전반에 대한 인문과학적, 문예적 소양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것은 글쓴이의 눈깔을 달고 <삼국지-조조를 위한 변명>이라는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던 것처럼, 꼭 그처럼 이번의 경우 또한 그 아키타입한 원형적인 작품을 통해 서구 문화와 문명 전반에 대한 개괄적 지식과 더불어 서사 양식에 대한 문예적 소양을 제공하고자 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글쓴이의 눈깔이 달린 퍼스펙티브한 시각으로 독자들과 만나야 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고유한, 그러먼서도 보편적인 시각입니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을 촉발시킨 것은 ‘왜 일정한 시기에 서사시라는 특정한 양식이 출현하였는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특정한 세력이 권력을 잡은 시기는 그 세력들에 의해 지배적인dominant 형식이 나타나게 되는데-가령, 근대부르주아 시대는 하나의 상업적인 읽을거리로 시민서사시로서의 장편소설이 지배적인 형식이 되고, 지금 대중이 헤게모니를 잡은 시대에서는 쉽고 흥미 있으며, 술술 읽히는 대중적인 에세이가 지배적인 형식이 되고 있는 것처럼-그러니까 시대와 형식 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령, ‘철학이란 사상으로 포착된 그 시대’라던 헤겔의 말처럼, 형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이 책을 쓰는데 있어 하나의 대전제가 되었던 것으로, 이것은 사실 <텍스트는 젖줄이다-대중서사론 입문> 이래 글쓴이의 오랜 화두로서, 이것은 궁극적으로 글쓴이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화두로 틀고 있는 필생의 저작-<세계문체사-시인은 왜 철학자를 고발하였나>-의 예고편이 될 만한 성질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정신적 허기에 비유할 만한 것으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만족을 모르는 존재이니, 글쓴이 또한 예외일 수 없이 머 인간은 태초 이래 선악과를 따먹은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지닌 존재가 아닌가 하니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보아서, 글쓴이가 동양의 대표적인 기서奇書 <삼국지>에 이어‘유럽 문명의 근본 텍스트'(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라 불리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해 보것다고 나선 것은 인문적 소양 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 아니 뭐 솔직히 말해서 지적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동양인으로서 대체 서구 문명과 사유의 같고 다른 본질이 무엇인지,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화 유전자로서의as a gene of culture 익스크루시브한 배타적 개념지로서 저들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 둘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학비재한 글쓴이로서는 증말이지 불감당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사전준비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것은 전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대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 대한 하나의 세계문체사로서의 양식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문예적 관점에서의 서사敍事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하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한 언어고고학적 지식이 전무한데다가 서양문화와 문명사를 면면히 가로지르고 흐르는 대하장강과도 같은 수많은 일차 텍스트와 수많은 참고서지에 대한 개괄적이고 통사적인 사적 이해가 부족한 글쓴이에게 최소한 호메로스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플라톤의 <국가>를 비롯, <오디세이아>의 창조적 모작인 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도 일별을 해둬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과 정력, 자본이 부족한 글쓴이로서는 도대체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디세우스처럼 나 또한‘먼 길a long march’을 떠나는 놈으로 급할 거 없으니 ‘에라 모르것다 언제 가도 가것지...’ 하고 여기서 쉬었다 저기서 잤다 동가식서가숙하는 느긋한 심정으로 10여 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니, 글쓴이 또한 한국의 문학뉴스 전문‘뉴스페이퍼'에 연재 기회를 잡았다가 중도에 그치고 세월을 헛되게 흘려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머 뒷심도 뒷심이지만 도대체 능력이 미치지 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먼서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마치 시골 촌놈이 대도시 서울에 와서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내다가 마치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시골 친구에게 서울이란 데는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처럼, 꼭 그처럼 글쓴이 또한 수십 년을 문예비평가로 이렇게 저렇게 굴러먹다보니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서구문예사와 고전 그리스, 특히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한 나름 개념의 눈깔이 떠지기 시작한 것도 없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는 꼭 써야지...’ 하고 큰 다짐을 먹고 있었지만, 당장 급한 불을 끄는 심정으로 한국문학사 100년을 조감하고 결산하기 위해 또한 몇 년 동안 <네거리의 예술가들>과 <철학자 김수영>, 문제의 <청년 임화>를 쓰느라 또 한차례 고투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다시쓰는 한국문학사 3부작’을 어렵게 출간해 놓고 보니 호메로스라는 높은 산마루가 저 무슨 설산 영봉처럼 눈앞에 턱 걸리듯 이놈의 헛된 다짐을 해 두었던 무모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니, 대체 스스로와의 약속도 약속이니 게으르고 능력이 부족한 늘샘은 인자서야 저 방대한 유럽 문명의 근본 텍스트에 대한 모험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니, 머 작가의 숙명이거니 다만 기억의 여신 뮤즈에게 작은 기원을 던져보았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발 좀 모뉴멘털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제대로 된 작품이 나와 달라고 말입니다. 하여 인자부터‘쓴다 쓴다' 하고 초만 치던 게으름과 나약함에서 벗어나 멀고 먼 글쓰기 오디세이 여정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니...

벗들이여 떠나세...
새 세상을 찾아가는 것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내 목표는 저기 해지는 곳 너머까지 바닷길을 떠나는 것일세
그 옛날 하늘과 땅을 호령하던 힘은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 이렇게
마음만은 용맹스럽게
영웅의 용기와 한결 같았던 기개가
시간과 운명 때문에 약해지긴 했어도
분투하고 추구하고 탐험하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강한 의지로

ㅡ테니슨의 '율리시스' 중에서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모든 일이 혼자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원한 사부 조재훈은‘서사이론the theory of narrative'을 더 공부하라시며 격려와 함께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늘 주문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부족한 늘샘을 늘 격려해주고 도와주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름 모를 수많은 무명의 독자들이 이 책의 출간을 고대하고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또한 글쓴이만큼 서구문명의 본질에, 개념지에 목말라 있던 것입니다. 대체 유럽 문명의 근본 텍스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서사시epics'라는 대양식이 암시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그들 또한 저 깊은 마음속 어딘가에 그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형이상학적 순수지에 대한 깊이 모를 그리움이 반지처럼 하나의 둥글고 아름다운 무늬로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김상천 문예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