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고 나니, ‘언제까지 일할 거야?’라고 누가 묻는다면 ‘이젠 전 은퇴 없어요. 종점 없이 쭉 갈 거예요.’라고 말할 자부심이 생겼어요. 쓰기 힘들었고 보여주기 그토록 힘들었던 제 이야기들이 맞아요. 온전히 날 지켜준 진정한 제 이야기들이어서 소중해요. (중략) 책을 쓰고 난 뒤에 제가 건진 단어는 ‘자부심’이에요. 망쳐지고 부끄러움으로 가득했던 제 혼돈스러운 바닥을 딛고 올라서는 데는 제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제일 필요했어요. 나를 찌르던 것이 어떻게 날 지킬 수 있게 되었는지 말하다보니 제 심장이 막 뛰대요. 감춰야 하는 비밀이 내 힘이 되었고 아무도 모르는 그 경험들 때문에 내 인생을 사랑으로 채웠다고 고백할 수 있었어요.”

『이토록 가까운 거리라니요』(구름의시간)의 작가 하혜련은 20년 이상 경력의 ‘이웃집 치과의사’다. 요즘 치과 병원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사는 당산역 주변만 해도 10층 이상의 건물에는 모두 치과 병원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렇게 경쟁이 심하니 작가도 병원 운영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가는 “겉은 의사지만 속으론 작가를 꿈꾸는 나는 자주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갔다. 그 둘의 거리는 얼마나 멀었던가. 매번 벗어나고 싶었지만 치과의사의 삶을 벗을 수 없었던 이유와 내가 조금 더 사람다워지고 의사다운 의사로 살아가고 싶다는 이유를 이 책을 쓰면서 알았다”고 말한다.

나는 작가가 “글쓰기를 하며 새로운 마음을 찾았다. 쓰는 과정을 통해 변화된 내가 생겼다. ‘일은 내 운명’임을 알았고 치통과 마음 통증은 비슷하며 귀 기울여 살필 때 통증이 완화되리라 믿게 되었다.”는 머리말의 글을 읽고 편안 마음으로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글은 ‘나가며’의 일부다.

대학 시절이었다. ‘시론’을 가르치던 교수님은 한 목수의 이야기를 하셨다. 당시만 해도 목수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그 목수가 힘겹게 일하며 소설을 써서 한 문학상에 투고한 작품이 당선되었다. 소설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다시 읽을 수 없다고 했다. 목수가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픙로는 글만 써서 먹고 살겠다고 선언했는데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김민섭 작가는 『당신은 제법 쓸 만한 사람』(북바이북)에서 “매일 쓰는 삶이란 결국 좋은 하루를 살아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사람으로 나로서 하루를 살아내야 우리는 계속 글을 쓰고 자신의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며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민섭 작가는 작가답게 멋있게 말했지만 나는 책은 문장력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삶’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라고 투박하게 말해왔다. 축적된 삶이 바탕이 되어 책을 펴낸 이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가끔 만난다. 나는 그들을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

하혜련 작가는 ‘거리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거리감이 사라진다면, 의사와 환자는 입장 차이로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치료라는 어려운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 부부가 같이 오고 엄마와 딸이, 아빠와 딸이 같이 오면, 가족이어서 할인해주고 특별히 뭔가 더 잘 대해주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알려준다.

“나뭇가지에 걸린 달을 보며 삶을 생각한다. 달이 멀리 있어 서운한 게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감싸고 있는 거라 생각하며 하늘을 봐야겠다. 소중한 것일수록 너무 가까이 하면 깨진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을 때가 많았으니까. 내 곁에 다가오려던 사람이 깨져선 안 되니까. 그 거리에 서운함을 느껴서도 안 되겠다. 내가 미리 거리를 두고 걷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를 지켜주는 거리로, 서로를 안심시키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말이다.”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너무 가까웠던 사람들이 상처를 주곤 했다. 누구의 책임을 떠나 너무 가슴이 아프다. 한순간의 다툼이 영원한 이별로 이어지곤 했다. 이젠 변명을 할 수도 없다. 아픔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만 한다. 다시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일이어서 회환만 남는 경우가 많다. 작가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육체적인 노동 후에 쓴 에너지는 금방 알아채요. 마음은 어떨까요. 감정을 소모한 후에 우리가 쓴 에너지를 계산해볼까요. 가족 생각에 쓴 마음은 200칼로리, 재정 걱정에 쓴 마음은 400칼로리, 친구 문제 고민은 200칼로리,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쓴 마음은 300칼로리. 당신이 오늘 쓴 마음은 도합 1100칼로리. 이제 합산해서 인지한 후에 1100칼로리 나가는 햄버거 세트를 먹어요. 소모되어 기운 없는 부분을 보충하려고 먹어보지만 일시적입니다. 먹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쉬지 못해서라면 쉬어야 해요. 내가 가장 편안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 하는 곳에서요.”

먹어서 해결되고 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하혜련 작가처럼 글을 쓰면 치유가 된다. 작가는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오래한 이 같다. 이렇게 함께 한 다음에 책을 펴내면 누구든지 작가처럼 “인생 끝점은 이제 없는 겁니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