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공주에서 정안길을 걷고 온 다음 날 아침, 팔다리 온몸에 힘이 빠져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산티아고에 가면 이런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20km 이상을 걸어야 한다고? 아~아~난 못 해! 난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나이에 욕심이 과했나 싶었다. 나이들수록 욕심은 금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불가능한 쪽으로 무게 추가 다시 옮겨갔다. 아침 일찍 박선생에게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화하니, 심리학도 공부한 사람답게 나를 잘 다독여주었다.

그러던 중 박선생이 지인의 소개로 산티아고 40일 순례길을 주관하는 H여행사를 알게 되었고, 하루 20kg의 배낭을 메고 20km를 걸어 날마다 알베르게를 예약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되었다. “걷기만 하자! 이 나이에 800km 걸을 수 있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지”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야심차게 준비했던 개인 순례의 꿈을 접고 여행사 팀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3일 후, 5월 6일에 드디어 도보순례 1일 차를 맞이하였다. 첫날의 구간은 일상의 짐들을 동키 서비스에 모두 맡긴다 해도 생장에서 론세스바에스Roncesvalles까지 26km로 피레네산맥을 넘어야 하는 가장 험난하기로 악명이 높은 구간이다. 이 구간은 19세기 초 스페인의 독립전쟁 중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 전투에서 고전을 겪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일명 '나폴레옹 길'이라고도 불린다. 첫날부터 택시로 이동하겠다는 사람이 팀원 25명 중 두 명 나왔다.

점심으로 빵, 사과, 물과 바나나만 챙겼는데도 배낭이 무겁게 느껴지면서 상당히 부담되는 하루였다. 피레네산맥 정상, 고도 1450m에 있는 콜 데 레푀데르Col de Lepoeder까지 18km 쭉 올라갔다가 고도 950m 지점에 있는 론세스바예스까지 7km를 내려와야 하는 구간이다. 어제 밤잠도 설쳤는데 이 무거운 배낭을 지고 그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하루 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두려움은 수시로 찾아와 "넌 못해! 하면 큰 일이 일어날거야!"라며 겁을 주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고 수시로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셨나 보다.

어쨌든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박선생, 신선생과 첫 출발을 일정한 거리로 보조를 맞추면서 두려움을 떨쳐 낼 양으로 스틱을 힘차게 땅땅 찍으며 걷기 시작했다. 박선생이 제일 앞장서 두 개의 스틱으로 통통 튀듯이 리듬에 맞춰 경쾌하게 걸어 나갔다. 제일 염려되었던 이가 앞장서 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신선생의 순례길 합류 계기가 “박선생도 가는데 왜 내가 못가?”였다,고 하니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신선생은 모든 면에서 박선생을 언니라 부르며 조언을 구하고 따랐지만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나 보다.(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