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대학교 교수

4. 달생達生(통달한 삶)

생명의 참된 실상에 달통한 자라는 의미의 ‘달생達生’이란 편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편은 삶에 통달하기 위한 혹은 통달한 삶을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힌 내용이다. ‘달생’이 의미하는 바는 「달생」편의 첫머리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첫머리의 요지는 ‘나날이 무한한 생명을 얻어 지극한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 편의 내용은 <노자> 50장과 진술방식이 대략 같으며, 주장하는 것도 같다고 판단된다. <노자>50장과 「달생」편을 비교해 보자.

“태어나면 죽게 마련(出生入死)”이라는 「노자」50장의 말은 “생명이 생겨나는 것을 물리칠 수 없고, 또 생명이 가버리는 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生之來不能却, 其去不能止)”라는 -「달생」편의 말과 그 의미가 같다. “삶의 도를 취해 삶의 도를 극진히 한다”는 왕필의 주석을 참고 하면, <노자>50장의 “삶의 무리(生之徒)”는, 「달생」편의 “생명의 참된 실상에 달통한 사람은 생명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힘쓰지 않는 사람(達生之情者, 不務生之所无以爲)”일 것이다. 또한 <노자>50장의 “살려고 바둥대다가 죽음의 땅으로 가는 사람(人之生, 動之死地)”은, 「달생」편의 “형체만 기르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世之人以爲養形足以存生)”에 해당할 것이다.

<노자>와 <장자>의 「달생」이 결론으로 내세우는 주장의 함의도 다르지 않다. 「달생」에서의 결론은 “세속의 일을 버리고, 마음의 구속을 버려 저 자연의 조화와 더불어 날로 새로이 무한한 생명을 얻으(棄世則无累, 无累則正平, 正平則與彼更生, 更生則幾矣.)”라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노자> 50장의 “죽을 곳이 없는 것(以其無死地也)”을 의미한다. “죽을 곳이 없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고, 이는 매일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달생」편은 이 과정을 조금 세분화해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세상 사람들이 골몰하는 형체 기르기(=養形;養生;攝生)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한다(夫欲免爲形者, 莫如棄世. 棄世則无累)”. 두 번째는 “마음의 구속을 버리라고 한다(无累則正平, 正平則與彼更生)”. 세 번째는 “천지의 조화와 하나 되라고 한다(棄事則形不勞, 遺生則精不虧. 夫形全精復, 與天爲一).” 이로부터 귀결되는 삶은 “나날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과정(更生則幾矣)”이다.

한편, 「달생」편에서도 우리가 아는 의미의 섭생(養形)은 부정된다. 「달생」편에서는 섭생을 위해 골몰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을 구속한다고 본다. 섭생에 골몰하는 자들은 “왜 그것이 속된 일인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속된 생명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섭생에 골몰하는 삶은 속된 생명이자, 버려야 할 생명(事奚足棄而生奚足遺)”이라고까지 말한다. 육체 기르기(養形)를 보다 구체적으로 비판하는 내용도 있다. 호흡과 동물의 동작을 흉내 내는 도인술을 하는 사람(道引之士)들을 거론하면서, 이들은 팽조와 같이 되려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달생」편 첫대목을 이어서 받아 논의를 진행하는 두 번째 대목인 자열자子列子와 관이자關尹子의 대화도 <노자>50장의 “善攝生者”를 부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필의 주석에 따르면, <노자>에서는, ‘선섭생자’로 거론되는 갓난아이는 순수한 기氣를 간직하거나 덕德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달생」편의 이 대목에서는 갓난아이가 ‘지인至人’으로 대체된다. 지인은 지혜나 기교로 행하지 않고 순수한 기를 지키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갓난아이와 지인은 동일한 주장에 대한 다른 메타포일 수 있다.

「달생」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자>의 저자는 양형養形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달생」편의 첫 부분 두 대목은 <노자> 50장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자> 50장의 “죽을 곳이 없는 선섭생자善攝生者”에서 ‘섭생攝生’은 양형養形의 의미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한 양형養形을 위해 섭생攝生에 골몰해 팽조와 같이 되려는 자들은 <노자>50장에서 “인지생 동지사지人之生, 動之死地”의 무리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필자가 주장하려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노자>와 <장자>에서 ‘섭생’이라는 개념은 육체를 기르기 위한 양생술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 기르기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정신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도출하기 위해 필자는 두 가지 논증을 사용했다. 하나는 「노자」50장에서 계산되지 않은 10%의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노자>50장의 내용과 「달생」편의 내용이 대체로 동일한 함의를 갖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전자의 결론은 <노자>50장의 “선섭생자”란 양형養形으로서의 섭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자의 결론인 ‘달생’이란 세속적인 일들과 세속적인 삶을 버려야만, 나날이 새로운 삶을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의 논증이 타당하다면, <노자> 50장의 섭생은 신체보양하거나 수명을 연장하는 것과는 무관한 어떤 철학적 개념이자 태도일 수 있다. 또한 「달생」에서의 ‘달생達生’의 의미는 양형養形을 의미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양형養形을 부정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