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참나무는 상상할 수 없이 무거운 줄기와 가지와 잎을 지탱하고 서 있다. 아마도 수십 톤을 호가하는 무게일 것이다. 놀라움은 그뿐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 뿌리들의 활동은 쉬지 않고 저 높은 가지 끝으로 물을 운반한다. 저들이 내뿜는 산소로 지구상의 동물이 산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들을 위대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참나무는 단지 한 그루 나무일 뿐, 필요에 따라 우리는 언제나 밑동부터 잘라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IWZ(Internationale Waldkunst Zentraum)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열쇠를 방에 둔 채 출입문이 잠겼다. 내복 차림으로 나왔다 벌어진 일이다. 9월 13일 새벽 3시 마침 주말이라서 모두 퇴근한 상태다. 나는 삽시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명과 완벽하게 격리된 것이다. 마침 일기도 불순하여 계속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에 두를 뭔가를 찾아야 했다.
바람과 빗물이 차단된 텐트 안에 긴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신문지를 깔아 수평을 맞추고 낡고 칙칙한 매트를 깐 위에 버려진 침대보를 덮고 누웠다. 처음엔 몸을 눕힐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스러웠지만 얼마후 옆구리로 스며든 냉기가 온몸을 삼킬 듯 퍼져갔다. 텐트에 꽂히는 빗줄기의 요란한 소리는 점점 장송가로 들리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이 멈추어선 듯 초침은 느리게 가고 머릿속엔 쿠션이 부드러운 침대와 온기를 뿜어내는 난로에 대한 갈망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심지어 따끈한 차와 쿠키 아니면 커피도 좋을 것 같았다.
안데스의 눈에 조난된 비행기 승객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려 애쓰던 영화가 떠올랐다. 사지가 굳는 저체온증을 막기 위해 뭐든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밖으로 나갔다. 뜻밖에 옆 작업장에 쿠션이 깔린 의자 하나가 있었다. 폭신한 쿠션이 손끝에 닿는 순간 세상을 모두 얻은 양 기뻤다.
신문지와 딱딱한 매트 대신 쿠션을 깔았더니 등쪽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적어도 동트기 전까지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누워서 생각했다. 저 밖에서 온몸으로 이 차가운 빗물과 고독한 어둠을 견디며 살아가는 저 나무와 풀들은 얼마나 강인한가! 인간이 언제나 최강의 존재인 줄 알았는데 얼마나 촘촘한 보호막 속에서 우리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는가?
문명의 이기와 절연하는 순간 우리는 생사를 건 투쟁을 해야 한다. 문명이라는 보호막을 걷어내면 단 하루도 버텨내기 힘든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연계 최고의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문명이 소유한 각종의 연장 덕분이었다. 우리는 연장 없이 참나무의 가지 하나도 자르지 못할 존재지만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 같은 생명체의 입장으로 볼 때 매우 부적절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우연한 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문명의 보호막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말없이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우리 곁을 지켜준 저 나무와 풀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