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전한 삶(全生)을 살기 위한 방법
이봉호(경기대학교 교수)
1. 다 아는 이야기
노장에서 온전한 삶(全生)을 사는 사람의 메타포(metaphor)로 아기(赤子)의 이미지가 제시되는데 이 글은 그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노장에서 온전한 삶을 사는 존재로 제시된 아기 메타포가 의미하는 것은, 육체를 위한 삶이 아니라, 정신의 해방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노장의 사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적 지식(cognitio historica)은 증명된 적은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 중에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증명한 적이 없는 전수된 것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지식을 ‘이야기적 지식’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적 지식의 근거를 따져볼 때, 이야기적 지식은 ‘근거를 따져본, 그래서 합당한 근거위에 세워진 지식(cognitio philosophica)’이 된다. 이 글은 '이야기적 지식'을 '근거를 따져본 지식'으로 전환하는 시도이다.
노장의 사유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이미 주요한 철학적 분석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기 메타포에 주목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자연의 흐름에 따른 삶을 강조하는 노장의 사상에서 ‘삶과 죽음은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생명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知北遊」).’ 이를 ‘물화(物化)’ 혹은 전생(‘轉生)’으로 포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기 메타포에 초점을 맞추면, 노장사상에서 온전한 삶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포착되는 측면이 있다.
<노자> 50장에서 ‘섭생을 잘하는 자는 맹수의 공격을 받지 않고, 전쟁 속에서 해를 당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왕필은 이러한 삶을 사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아기를 제시한다. 왕필이 이러한 주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노자> 55장의 경문 때문이다. <노자> 50장 왕필의 주석과 <노자> 55장의 경문이 함의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장자>의 사유에서 드러나는 아기 역시, 온전한 삶(全生)을 사는 존재라는 의미가 강하다. <장자>에서 주요한 개념어들인 ‘심재(心齋)’, ‘좌망(坐忘)’, ‘상아(喪我)’를 체현한 존재로 아기의 메타포는 사용되기 때문이다.
노장의 사유에서 아기 메타포에 주목하면,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가 육체적인 측면에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의 삶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노장에 나타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게 될 터이다. 이때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용어로는 ‘天行’과 ‘尸行’을 사용하려 한다. ‘천행’이라는 용어는 <장자> 「각의」편에서 따 온 것이고, ‘시행’이라는 용어는 <노자상이주>(이하 <상이주>로 줄임)에서 따 온 용어이다. 두 용어가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에 노장의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을 포착하기에 용이하리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논의를 집중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자> 50장을 중심축에 놓고자 한다. 이때 주목할 문장은 “善攝生者……以其無死地”이다. 또한 왕필의 주석에서 ‘적자赤子)’에 관한 언설들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노자> 50장 경문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장자> 「경상초」와 「달생」편에서 확인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장자>의 이 두 편은 <노자> 50장과 55장에 대한 부연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증명하고자 한다.
“노장에서 온전한 삶(全生)의 메타포로 사용된 아이는 육체적 돌봄(養形)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 돌봄(養神, 抱神)을 잘 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