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과 빌런의 밤>/ 안숭범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2.11.18 07:04 의견 0

ㅡ나는 너의 몇 번째 물거품일까


안숭범 시인의 [소문과 빌런의 밤]은 문명에 내쳐져 물화된 이들을 조명한다. 더 이상 자연에 스스로를 되비칠 수 없게 되면서 우주가 아닌 인간(人間)에 처해진 한낱 존재들 말이다. 이를테면 “여기 당신은 없다”라는 「시인의 말」은 ‘여기’가 2인칭을 위한 세계가 아니라는 단언이다. 이곳에는 1인칭과 3인칭만이 존재한다. 역설이기도 하다. ‘당신’은 단지 1인칭이거나 3인칭일 뿐이다. 고로 반어이다. 필경은 3인칭에 불과한 1인칭인 당신이 ‘있다’. 요컨대 ‘여기’는 ‘나’와 ‘그들’로만 채워진 세계다. 2인칭이라는 징검다리가 부재하는 이곳에서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반대도 매한가지다. 이렇게 사람 사이(人間)가 절단되었다는 것이 [소문과 빌런의 밤]에 담긴 기본적인 인식이다. (김영범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지구를 지키는 슈퍼히어로팀 어벤져스도 아니고 더군다나 송해의 전국노래자랑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얼굴 없는 이름으로 그의 시(詩)를 다녀간다. 이들은 “의미 이전의 기억들”에서 온 존재들이어서 상실을 상실한 이름만으로 남는다. 시인은 이 이름들을 묶어 소문과 빌런을 만들어 내는데, 그들은 전 지구적이다. 필리핀과 하얼빈, 구미, 울진, 가거도, 오아시스, 올림포스산 당최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 갱스터나 비공인중개사, 무명 시인, 소설가, 히치하이커, 성가대원, 노름꾼 등의 형상으로 출몰한다. 시인은 그들에 대한 “모든 소문이 불타”고, “불타지 않는 기억에 잠긴 고약한 이야기”만 남을 때 비로소 시로 빚는다.

우리는 세계 안에 있지만, 얼굴 없는 이름의 그들은 세계 밖에 서 있거나 여전히 이탈을 꿈꾼다. 이렇게 그의 시를 읽는 사이 우리도 그만, 세계 밖에 놓이고 만다. 시인이 “그냥 써지는 이야기”이거나 “그저 쓰이는 마음”이라고 에둘러 말해도, 얼마나 많은 얼굴이 이 세상을 품고 있을까 하는 궁리가 멈추지 않는다. 시인과 함께 “사라진 사람의 살아지던 삶을 거두려” 한다. 그래서 안숭범의 세계는 불가항력적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정도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연구하는 학자의 내면이 얼굴 없는 삶과 사람으로 시에 새겨진다.

때로는 느와르나 코미디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호러와 멜로를 넘나들면서, 시인은 우리에게 사랑이 왜 가능한지를 은밀하게 속삭인다. 하지만 정작 답은 말하지 않는다. 시집 어느 낱장에서 형체도 알 수 없는 얼굴의 당신을 만나더라도 시인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당신은 여기에 없다’고. (김병호 시시의 추천사)


[소문과 빌런의 밤]은 안숭범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indie, under, wonder―초코파이 정」, 「낭만 요강―객원괴수 안」, 「나는 너의 몇 번째 물거품일까—투명 오」 등 47편의 시가 실려 있다. 안숭범야 시인은 1979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문학수첩]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티티카카의 석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소문과 빌런의 밤]을 썼다.

안숭범 시집 <소문과 빌런의 밤> 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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