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눈꺼풀은 어디로 갔을까(3)/ 하재일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하재일 승인 2022.05.08 13:21 | 최종 수정 2022.05.08 14:01 의견 0

1960년대와 70년대의 안면도 풍경을 보면 우리나라 여느 시골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광복, 한국 전쟁 등을 격은 전후세대의 성장기로 집집마다 자식들이 보통 5명에서 12명 정도까지 있었다. 격동기를 거쳤기 때문에 정신이상자도 많이 돌아다녔다. 옥뎅이는 남의 집으로 동냥 다니던 사람이었고, 굼지는 정신이상 여자로 주로 부잣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잔치집이나 초상집에서 늘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무세는 정신이상 남자로 화가 나면 무섭게 노려보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면 동창들 사이에서 '쟤가 옥뎅이야!'라는 말을 사용할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산발한 '굼지'나 쑥대머리 '무세'가 나타나면 사정없이 돌팔매질을 해댔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마가 터져 붉은 피를 흘리며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쫓아오던 쑥대머리 무세가 생각난다. 무세에 대한 얘기는 전설 비슷하게 많이 돌아다녔다. 한번은 방앗간 발동기가 고장이 나서 방앗간 주인이 속을 썩이고 있었는데, 마침 무세가 나타나 연료통에서 엔진으로 내려오는 호스를 뽑아 입으로 세게 불어대니 막힌 보리알이 튀어나와 기계가 잘 돌아갔다는 일화를 귀동냥으로 듣기도 했다. 무세는 머리가 매우 명석해 당시 기계분야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다들 머리가 너무 좋아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무세와 굼지는 항상 보자기로 싼 시커먼 보따리나 짚으로 엮어서 만든 구럭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다녔다. 어느 날 보니 굼지는 씨 모르는 어린 아들도 하나 안고 다녔다. 어릴 적,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자리잡은 지울 수 없는 흑백 영상 속에 그들이 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당시에는 도로 여건이 안 좋아 1973년 연육교가 완공되고도 버스가 하루 두어 차례만 고남면까지 다녔고 그 이전에 교통수단이라고는 오직 튼튼한 두 다리로 걷는 일 뿐이었다. 어떤 때에는 버스가(합승버스라고 부름) 고남 방면으로 가던 중 큰 고개를 만나면 승객이 모두 내려서 버스를 고개 위로 밀어 올리는 일도 있었다. 시속 40km를 넘지 못했고 뿌연 흙먼지를 날리면서 덜컹거리고 다녔고 마을길은 고사하고 큰 신작로도 비포장 도로였다. 태안 읍내까지 포장된 것이 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이웃 마을 간의 교류도 지금과 같이 원활하지 못해서 걸핏하면 청년들 간에 싸움질이 많았다. 운동회나 잔치, 무슨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언성을 높여 패를 갈라 싸움을 했다. 남정네들은 노름을 좋아해서 한겨울이 지나면 가장이 노름빚으로 가산을 탕진해 패가망신한 집안도 수두룩했다.

군에서 휴가 나온(특히 해병대 출신)삼촌들은 자신의 깡다구를 과시하기 위해선지 지서(파출소)에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피우기 일쑤였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 흑백 TV는 한 마을에 한 집 정도만 있었다. 우리 마을에도 14인치 TV가 웃말 동혁이네 한 집 밖에 없었다. 내가 TV를 처음 본 것은 5학년 때 시장에 사는 흥석이네 집에 하루 놀러가서 본 것 같다. 그때 시금치 먹고 힘쓰던 <뽀빠이> 만화영화를 본 게 내 생애 최초의 TV 시청이었다. 어찌나 재미가 있고 신기하던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저녁밥 먹고 난 후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극장처럼 연속극 보는 재미로 살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TV의 전력은 축전지를 방앗간 원동기에서 충전을 해서 사용했는데 한 번 충전하면 일주일 정도 사용이 가능했다. 전기가 다 소진되면 화면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화면은 대부분 12인치나 14인치 수신기였다. 동혁이네 집도 저녁밥 일찍 먹고 올라가야 자리가 났다. 좀 늦게 가면 아이들이 꼬이는 게 귀찮기 때문에 대문이나 외양간 옆 중문을 아예 잠가 버렸다. 나는 동혁이와 절친한 관계로 예외 없이 항상 TV를 시청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밤에 갔더니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동네 친구와 둘이 집에 있는 굵고 큰 손톱깎기(당시엔 쓰메끼리란 일본말을 썼음)를 준비했다. 당시엔 TV 수신 안테나가 집 뒤에 있는 산에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안테나선을 내려서 한 뼘 간격으로 일관되게 지그재그로 끊어버렸다. 그렇게 되면 TV 화면이 나오긴 나오지만 소나기가 내리듯 하면서 짜증스럽게 화면이 나오게 된다.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먼 옛날에 있었던 웃을 만한 이야기이다.

당시 인기 있었던 방송은 아프리카 정글을 배경으로 한 ‘타잔’,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이나 여건부 선수, 천규덕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조 프레이저나 조지 포먼, 무하마드 알리가 나오는 프로복싱 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던 마징가 제트, 은하철도999 등도 인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안면도 아이들의 모습은 대부분 남자는 까까머리였고 여자애들은 단발머리에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양말은 추운 겨울에나 신었고 관공서 직원이나 최소한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의 아들, 딸이나 되어야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나도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운동화를 한 번도 신어보지 못했고, 비닐이나 가죽으로 만든 책가방을 한 번도 들고 다닌 적이 없었다. 머리 모양은 상고머리(스포츠형)였고 책은 보자기로 싸서 메고 다녔다. 일반적으로 소풍가는 날이나 운동회가 있는 특별한 날이나 돼야 이발소에 가서 상고머리를 깎았다. 키 작은 아이들은 이발소 의자 손받이에 빨래판을 올려놓고 그 위에 앉아서 깎았다. 이발소에 가면 보리밭을 배경으로 한 초가집이 있는 그림 한두 점이 꼭 벽에 걸려 있었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어쩌구 하는 시구가 씌어 있었고, 「家和萬事成」같은 한자 성어도 걸려 있었다. 하얀 가운 입은 이발사가 새까맣게 때가 낀 가죽 혁대에 면도칼을 슥슥 문질러 날을 세워 칼로 귀 뒤쪽 목덜미를 면도할 때에는 섬뜩한 기운에 갑자기 소름이 날카롭게 돋기도 했다.

보통 때는 한 동네 두세 집 가지고 있는 면도기로 빡빡머리를 깎았다. 머리 깎는 이발기계가 너무 낡아서 잘 안 깎기거나 다루는 솜씨가 서툴러 머리털이 뽑혀 아파 서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이발기계가 불결하여 남자 아이들 대부분이 기계충을 앓거나 얼굴에 꼬무락지(종기)가 많이 났다. 대부분 아이들이 책보에 책과 공책을 싸서 학교에 오고 갔다. 누가 정했는지 남자애들은 어깨를 가로질러 등에 메고 앞쪽에 매듭을 해서 다녔다. 그러나 이상하게 여자애들은 허리에 매고 다녔다. 철로 만든 연필통이라 뛰어 다니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났고 연필심이 골 먹어서 칼로 깎아보면 이미 다 부러져 있었다. 비오는 날엔 우산이 제대로 없어 비를 홀랑 다 맞고 다녔다. 있다 해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 우산이 자주 뒤집어졌다. 신작로는 온통 질펀한 물 웅덩이였고 벌건 황토물이 도로 위로 철철 넘쳐흘렀다.

또한 먹거리가 충분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안면난초 꽃대인 아가다리, 몹시 신맛이 나던 정금, 껌처럼 씹었던 삐비, 단수수(사탕수수), 심지어 옥수숫대를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어쩌다 산골짜기에서 검은 머루나 산딸기를 만나면 그야말로 횡재한 것이라 생각했다. 감꽃을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다니다 먹었다. 찔레순, 명가람, 해당화 열매인 땡마람, 저수지에 나는 물마름, 산에서 나는 쥐밤, 도토리, 상수리도 먹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알게 된 노래 중에 ‘찔레꽃’이란 가요가 있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대충 이런 노래인데, 구석기 유적으로 유명한 공주 석장리 가는 금강 강둑길에서 불렀던 기억이 난다. 가난해서 너무나 서러웠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젊은 날 ‘찔레꽃’ 노래만 부르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한 가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맛으로 안면초등학교 앞 광선이네 바나나 빵이 있었다.붕어빵처럼 무쇠로 만든 빵틀에 굽던 바나나 모양의 빵이었다. 10원에 두 개를 주다 나중에 10원에 한 개였다. 중학교 앞에서도 바나나 빵을 팔았는데 그 고소한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한번은 학급빈가 뭔가 무명잡세를 내고 50원이 남았는데 집에 오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한개 10원하는 바나나 빵을 다섯 개 사먹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한테 돈을 함부로 쓴다하여 호되게 혼난 적도 있었다. 중학교 때는 뽀빠이와 라면땅, 쭉쭉 찢어 먹던 쫀드기와 하드(아이스 바)가 유행했다. 그 이전에 승언리 시장에 아이스 께끼(아이스 바) 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통에 담아 팔러 다녔는데 ‘아이스 께끼! 얼음과자!’ 하며 큰 소리로 외치고 다녔다. 엿장수도 많이 돌아다녔다. 나중에는 손수레나 경운기로 발전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지게에 엿판을 지고 큰 엿가위를 철석철석 거리며 다녔다. 괭이 부러진 거, 다 닳은 쟁기 보습, 빈병 같은 것을 주면 넓적한 엿판에 쇠로 만든 날카로운 끌을 대고 엿가위로 냅다 쳐서 조각을 내서 엿과 바꿔줬다. 그 엿의 단맛이 기가 막혔다. 엿장수들은 노란 고무줄이나 검정 고무줄, 이약, 좀약, 옷핀도 가지고 다녔는데 어머니들은 항상 생활 용품과 폐품을 바꾸어 생활에 보태 썼다.

마을 입구의 골짝이나 으슥한 곳에는 항상 상여를 놓아두는 상여집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그곳에 도착하면 대낮에도 마구 뛰어 지나갔다. 러브호텔이 없었던 때라 여기에서 청춘 남녀의 로맨스나 치정 사건도 많았다고 한다. 꽃상여 나가는 풍경도 구슬프고 요령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상두가도 구성졌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하 딸랑/ 명사십리 해당화야 나 진다고 설워 마라- 어하 딸랑’」 대나무 창대 높이 걸린 색색의 만장에 붓으로 쓴 글씨가 펄럭이며 길게 늘어섰다. 싸락눈이 내리는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소나무 숲속 골짜기 속으로 울려 퍼지던 상여꾼들의 상두가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게 맴돈다.

5월이면 논갈이가 시작되었다. 농사채가 많은 집이나 또는 웬만한 집에서는 길들인 농우(소)가 있었고 이것마저 없는 집은 마을마다 논 밭갈이를 전문으로 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소를 포함해 하루 품삯이 기억 잘 나지는 않으나 품앗이인 경우 소와 쟁기를 빌려오면 세 품으로 인정했고, 사람까지 와서 갈아주면 네 품으로 갚아야 됐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논갈 때 쟁기로 흙을 뒤집어 놓는데 이때 주전자 들고 따라다니며 겨우내 흙속에 숨어있던 통통한 미꾸라지를 바쁘게 주워 담았다. 부잣집에서는 머슴을 두고 있었다. 머슴이 받던 새경은 많이 받는 상머슴이 한 달에 쌀 두 섬(쌀 80kg 두 가마니) 부지런한 농사꾼은 겨울에도 놀지 않고 가마니를 치고, 짚으로 새끼를 꼬아서 집에서 쓰고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나중에는 가마니 치는 기계와 새끼 꼬는 기계가 나왔다. 대부분 초가집이었으나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나중에는 함석이나 슬레이트, 또는 시멘트 기와로 바꾸었다. 탱자나무나 잡목을 엮어 만든 울타리에서 담장도 시멘트로 만든 벽돌로 담장을 쳤다. 농로로 사용하는 마을길도 넓혀서 전반적으로 곡선의 미에서 직선의 미로 확 개량을 해 버렸다. 삽이나 괭이, 쇠스랑, 곡괭이는 지금도 있지만 당시에 넓적한 가래가 있었다. 포크레인이 없었던 시절, 큰 둑을 쌓을 때 한사람이 손잡이를 잡고 큰 삽날에 양쪽으로 줄을 걸어 세 명이 함께 흙을 떠 던지던 기구였다. 도리깨와 벼이삭을 훑던 홀태가 있었고, 발로 밟아 돌리며 벼를 털어내던 기구인 호롱기가 있었다. 그밖에 물을 퍼 올리던 기구,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혼자서 삼발이에 걸어서 일하는 것이 있었고, 위에 올라타서 발로 밟아 돌리던 물레방아, 목화씨를 앗을 때 손으로 돌리던 기구, 여물을 썰던 시퍼렇게 날 선 작두가 있었다.

6월 말에 하는 보리타작이나 가을이 되어 10월경 벼를 수확한 후에 동네마다 타작하던 풍경이 생각이 난다. 장정 너덧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집집마다 돌며 순서대로 움직였다. 무거운 기계를 우선 말뚝을 박아 고정시킨 뒤 발동기에 냉각수를 붓고, 발동기 코를 한 손으로 잡고 또 한 손으로 돌려 발동을 걸었다. 피대를 걸어 탈곡기를 돌리고 나면 귀가 멍멍하게 시끄럽고 먼지가 뽀얗게 구름처럼 피어났다. 부엌에는 소여물을 끓이거나 물 데울 때 쓰는 무쇠로 만든 큰 가마솥이 있었다. 다음으로 큰솥보다 작은 밥 짓는 솥이 있었고, 좀더 작은 국 끓이는 솥이 하나 더 있었다. 아궁이 부뚜막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붙박이 찬장에 밥그릇을 수납할 수 있는 살강이 있었다. 보통 부엌 뒤편에 솔가리나 졸가리 같은 땔감을 보관하는 나무 광이 있었다.

밥을 지을 때는 단단한 보리쌀이 뜸이 잘 들어 밥이 퍼지게 하기 위해 불을 두 번이나 땠었다. 여름철에는 보리밥을 해서 부엌 중간에 대나무 소쿠리를 삼베 보자기로 싸서 높이 매달아 놓았다. 학교에 갔다 먼 길을 달려와 사립문을 밀며 엄마를 부르면 엄마는 밭일 나가시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날엔 바가지에 보리밥을 가득 퍼서 뒤란 장광으로 달려가 고추장을 퍼 담고 우물에 담가 놓은 열무김치를 꺼내어 함께 버무려서 정신없이 퍼 먹었다. 먹다 보면 코끝이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나는 다시 득달같이 웃말로 달려가 동혁이를 불러내 미개 벌판이나 솔섬 근처 바다로 가서 새 새끼를 꺼내거나 물놀이를 했다. 사랑방이나 안채와 떨어진 별도의 방에는 소죽 끓이는 가마솥이 있었고 그곳에서 생솔가지를 쳐다가 수시로 군불을 때기도 했다.

예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천수만 건너 광천 독배 사람 장사익이가 공연 하는 것을 보러 갔다가 찔레꽃이란 곡을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 겪은 설움이나 恨을 광천 새우젓처럼 푹 곰삭혀서 걸러낸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나는 왜 이 풍요롭고 빛나는 계절에 하필 고향 안면도에서 가난했을 때 만났던 하얀 찔레꽃을 머리에 떠올리는가?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당신은 찔레꽃! ㅡ장사익 노래

장사익이가 부른 ‘동백 아가씨’도 비 오는 날에 정말 들을 만하다.

(찔레꽃이 피었네/ 하재일 시인)

하얀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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