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눈꺼풀은 어디로 갔을까(2)/ 하재일

바닷물에 씻어 먹었던 해당화 열매, ‘땡마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하재일 승인 2022.05.03 09:28 의견 0

안면도엔 또 하나의 고마운 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모감주나무나 굴거리나무가 아니라 바로 해당화(海棠花)다. 해당화는 장미과의 꽃으로 전국의 바닷가 모래땅에서 주로 자라며 5월에 시작해서 9월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꽃이 피고 져서 아름다운 해변 풍경을 장식한다. 홍자색 붉은 꽃은 뭍을 그리워하는 바닷가 사람들의 아련한 그리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바다와 관련된 노랫말이나 시구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내가 어릴 때는 해당화 핀 언덕에 유난히도 개구쟁이 아이들의 발길이 잦았다. 잘고 날카로운 가시가 수없이 박혀 있어 접근이 힘든데도 해당화 열매가 익기를 기다려 그것을 따서 먹었다.

해당화는 키가 약 1.5m에 달하며 뿌리에서 많은 줄기가 나와 큰 군집을 형성하여 자란다. 줄기에는 갈색의 커다란 가시, 가시털(刺毛), 융털 등이 많이 나 있고, 가지를 굉장히 많이 친다. 잎은 7~9장의 잔잎으로 이루어진 깃털 모양이며 겹잎이다. 열매는 둥글고 붉은 황색의 수과(瘦果)로 익으며 윤기가 났다. 바로 그 해당화 열매 수과로 익는 ‘땡마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여기서 수과(瘦果)란 말은, 식물의 열매에서 폐과(閉果)의 하나로 껍질이 말라서 목질이나 혁질(革質)이 되고 겉으로 보기에 씨 같으나 실제로 속에 진짜 씨가 들어 있다. 예를 들면 메밀이나 민들레, 해바라기 씨앗 등의 열매가 이런 수과에 해당된다.

한여름이 되면 우리는 고난의 바닷길을 따라 멀리 우회하여 집으로 귀가했다. 안면초등학교에서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곧장 오면 한 시간 정도면 귀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땡마람’을 따기 위하여 서너 시간이 걸리는 ‘갯가’로 돌아오는 것이다. 책보를 둘러메고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해당화 밭에는 가끔 머루 넌출도 얼크러져 있었다. 어떤 날은 익지도 않은 시퍼런 머루를 따서 먹은 기억도 있다. 한 가지 위험한 것이 있다면 가끔 ‘오빠시’떼를 만날 수 있었다. 노란 몸매에 검은 줄이 간 ‘오빠시’는 허리가 잘록하고 날씬한 벌이었는데 벌집에 군사는 많지 않았다. ‘땅벌’은 군사가 워낙 많아 야밤에 횃불을 들고 치밀한 계획 하에 토벌을 했지만 오빠시벌은 벌집도 작고 수효가 적어서 긴 막대기 몇 개만 있으면 우리는 항상 전투에서 가볍게 승리하는 편이었다. 간혹 소수의 아이들이 벌에 쏘이면 바다로 달려가서 짠 바닷물에 담그면 그만이었다. 우리가 바닷가로 돌아서 귀가하는 날은 일부러 벌집을 튕겨서 막대기로 쳐 무찌르며 해당화 밭을 종횡무진 흔들며 지나갔다.

책보를 둘러메고 뛰다보면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 안에서 쇠젓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이쯤 되면 배가 몹시 고팠다. 밥풀이 붙어댕긴 도시락을 우선 바닷물로 깨끗하게 씻은 다음 땡마람을 따서 안에 가득 채웠다. 세차게 허기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붉게 윤이 반짝거리는 황색 해당화 열매를 반으로 잘라 바닷물에 씻었다. 물로 씻지 않으면 작고 가벼운 융털이 날리는데 이게 말썽이다. 알몸에 닿으면 보리꺼럭처럼 온몸이 가렵기 시작한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하여 아이들은 지혜를 짜냈다. 짠 바닷물에 씻으면 털도 안 날리고 맛도 좋아지고 일거양득이다. 열매를 입 속에 넣으면 맛이 더욱 깊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신맛과 단맛에 짭쪼롬한 맛까지 합쳐져 오묘한 맛의 향연에 놀랍게 초대받는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멀리 저녁노을이 다가왔고, 이제 갈매기도 집으로 돌아가서 서너 마리밖에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바다는 밀물과 썰물에 뒤척일 뿐 말이 없다. 삼년 전 간밤에 가발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서울로 야반도주한 초등학교만 나온 누이들은 그런 날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어린 화자로 돌아가 다음과 같은 짧은 구절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책보를 둘러메고 집을 향해 오던 길엔
가늠할 길 없는 흐릿한 바다가 있었고
길목엔 어김없이 허기가 도사리고 앉아
나풀거리는 갈매기마냥 끼루룩대고,
명사십리 온 천지에 앳된 얼굴 날 반기는데
도회로 일찍 나간 누이 소식은 없고
잔가시가 잔뜩 돋친 해당화 열매,
땡마람을 바닷물에 씻어 먹으며
어서 빨리 집으로 가야지, 하는 꿈결
어느새 구름인지 바다인지 분간 없어
어둑시니가 다가오며 붉은 놀을 뿌렸다.

(해당화/ 하재일 시인)

해당화
해당화 열매, 땡마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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