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눈꺼풀은 어디로 갔을까(1)/ 하재일

우리나라 소나무는 무척 더디 자라는 나무이다. 때문에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나무이다. 소나무는 살아서 300년을 살다가도 그 아름다움이 잘만 간택이 된다면 궁궐의 재목으로 쓰여 다시 1,000년을 살 수도 있다.

하재일 승인 2022.04.30 10:46 | 최종 수정 2022.04.30 14:43 의견 0

안면도에는 소나무가 많다. 어디를 가나 다른 나무는 없고 소나무 한 종류만으로 펼쳐진 모습이 장관이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눈에 싫증이 나지 않는다. 때때로 이는 충동이지만 소나무를 향해 넙죽 엎드려 경배라도 드리고 싶다. 안면도에 있는 안면송은 바닷가에 자라면서 줄기가 곧고 곁가지가 드문 적송(赤松)이라 예로부터 궁궐의 재목이나 배를 만드는 목재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어렸을 때 소나무 밑에서 대나무 갈퀴를 이용해 솔껄(솔가리)을 참 많이도 긁었다. 솔가리는 그 나무 밑에 오래 쌓여서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인간이 불쏘시개로 이용하기 위해서 중간에 앗아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땔감이 필요했다. 양지 바른 잔솔밭에서 솔가리를 긁던 추억에 온몸이 문득 노곤해진다.

겨울이나 이른 봄에 나무를 하다 배가 고프면 소나무 밑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러면 거기 푹신한 솔가리 사이에 지천으로 춘란(春蘭)이 자라고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것을 난초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 시절 겨우내 난초가 밀어올린 꽃대를 동네 아이들은 ‘아가다리’라고 불렀다. 이른 봄 아이들 손에는 항상 ‘아가다리’가 한 움큼씩 쥐어져 있었다. 맛이 약간 쌉쌀하고 입안이 알싸했다. 혀끝에 닿는 맛이 삐비(삘기)나 찔레처럼 달콤하거나 시원한 맛이 전혀 없었다. 목에 넘어갈 때 톡 쏘는 꽃대의 어떤 독기 같은 것을 솔직히 느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학교 현관이고 행정실이고 온통 안면난초 화분이 즐비하였다. 그 당시 대처에 살던 선생님들께서 많이 부임하셨는데 산에서 채취한 난초를 많이 도회지로 가져가신 분도 있었다.

봄날 양지쪽에 지게를 뉘여 놓고 기대앉아서 '아가 다리’를 하나씩 손톱으로 까먹으며 바스락거리는 예쁜 장지도마뱀을 잡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지난 95년 8월 초 사업하는 중학교 동창을 따라 미얀마(버마)의 수도 양곤에 여행을 갔었다. 마침 우기라 한낮에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 스콜이 심하게 내렸다. 그런데 수풀 속을 거닐다 보니 몸집이 엄청 큰 도마뱀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버마의 도마뱀 역시 독이 없고 성정이 순하다면서 겁먹지 말라고 친구가 귀뜸을 해 준 일이 있다. 그 순간 유년 시절 안면도에서 만났던 한 뼘 크기의 작고 예쁜 도마뱀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무척 더디 자라는 나무이다. 때문에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나무이다. 소나무는 살아서 300년을 살다가도 그 아름다움이 잘만 간택이 된다면 궁궐의 재목으로 쓰여 다시 1,000년을 살 수도 있다. 고고한 자태와 덕성스러운 기품이 비루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소인배들에게 때로는 시류에 편승하지 말라는 준열한 가르침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지조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래서
論語에 ‘세한연후, 지송백후조(歲寒然後, 知松柏後凋)’라는 말이 전한다. 조선 후기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린 추사 김정희의 '歲寒圖'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제주도 유배지의 어려운 역경 속에서 선비의 절개를 꺾지 않고 꿋꿋이 시련을 이겨낸 자신을 은근하게 나타내고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추운 겨울이 와도 절개를 굽힐 줄 모르는 게 바로 조선의 선비정신이었다.

안면도의 소나무 숲은 거센 바다 바람을 이겨내고 일어선 늠름한 푸르름이 단연 돋보인다. 어디서 바라보아도 소나무가 이룬 대동세상의 깊은 푸른색이 보는 이의 안복(眼福)을 넉넉하게 한다. 내가 자란 정당리와 승언리, 중장리의 소나무 숲은 사람과 함께 숨을 쉬며 교감하는 친근한 마을의 숲으로 자리 잡았다. 대문 밖이 바로 소나무 숲이며, 울타리 너머가 이어서 솔밭이며 낮잠에서 깨어난 발끝에 서 있는 게 소나무 숲이다. 사람의 숨결과 함께 호흡하며 가깝게 자리하는 소나무들이 한없이 정겹고 친밀하게 느껴진다. 밭에 김을 매다가 쉴 때도 소나무 숲속에 가서 쉬고, 논일을 하다가 땀을 식힐 때도 소나무 숲에 가서 한숨 돌린다. 아늑한 소나무 숲속에서 비둘기가 낮은 음성으로 한낮의 구름을 정겹게 부르면 안면도의 대낮은 바다 속처럼 고요해서 마치 꿈길에 닿은 듯하다.

소나무는 한반도에서 아열대로 진행되는 기후 변화 때문에 앞으로 100년 이내에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전문가의 진단이 있다. 지금 안면도산 우량종 소나무는 전국에 퍼져 쑥쑥 자라고 있다. 안면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질 나쁜 외래종자가 날아와 유전자를 오염시킬 가능성이 매우 낮은 곳이다. 최고 품질의 소나무 유전자를 보존하는 클론뱅크(clone bank)의 최적지이다. 그래서 국내산 소나무 종자는 대부분 안면도산이다. 안면도에서 생산된 소나무 종자가 전국에 뿌려져 숲을 만들어 나간다. 예전에 대규모 산불이 났던 강원도 고성군도 안면도에서 채취한 소나무 종자를 뿌렸다고 한다.

소나무 씨앗이 발아하여 쓰임새 있는 나무로 자라려면 적어도 100년에서 150년은 기다려야 한다. 고궁이나 고사찰 등의 문화재 복원에는 소나무만을 사용할 수 있다. 소나무가 없다면 문화유산을 지켜낼 수단이 사라지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160만여 그루의 안면도 소나무를 보듬고 지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당대에 성과를 누리는 일이 아니다. 지금 내가 심은 한 그루 나무는 증손자나 고손자 대에 내려가야 겨우 쓸 곳을 생각하게 된다. 다음 세대를 아끼는 마음이 없으면 나무를 심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관령 자연휴양림은 1922년경 직접 땅에 씨앗을 뿌려 조성한 국낸 최대의 소나무 숲이라 전한다. 대관령 휴양림은 이제서 그 진가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도 나무와 숲의 가치는 우리의 기대를 넘고도 훨씬 남는다.

내가 어린 시절 안면도에서도 대규모의 산림녹화 사업이 있었다. 잡목을 제거한 산에 일정하게 줄을 맞추어 어린 소나무 묘목을 심었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중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다. 심은 다음 시간이 좀 지나자 낫으로 옆의 키 작은 나무들을 쳐 냈다. 조로에 물을 채워 말라가는 어린 묘목에게 물을 뿌려준 기억도 난다. 중학교 다닐 때 더운 여름철에는 마을 이장이 동네 중고생들을 모아 낫을 들고 어린 소나무 옆의 잡목들을 제거하게 시킨 일도 생생하다. 창기리를 지나 ‘부뜨기’ 언덕을 넘어갈 때 차창 밖으로 보면 이제 소나무의 키가 나보다 훨씬 높이 자랐다. 그때 나도 일에 참여했지만 우리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가꾼 소나무들이다. 나무가 의젓하게 자란 모습을 볼 때 왠지 가슴이 뿌듯하고 마음이 한량없이 기쁘다.

안면도 소나무는 키가 크고 두껍고 잘생겼다. 녹색 빛깔의 포근한 안면송은 유난히 붉고 곧게 자란 우리의 토종 소나무이다. 사람의 키를 넘는 높이 이상 자라서는 보굿의 껍질은 얇아진다. 그래서 안면도 소나무는 앞에서 보면 붉은 숲이요, 위를 쳐다보면 푸른 숲이다. 소나무의 미끈한 다리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저절로 손으로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만다. 열반하신 법정 스님도 ‘불일암’ 앞에 있는 후박나무를 가끔 끌어안기까지 하셨다는 상좌 스님의 TV인터뷰를 보았다. 하늘까지 곧장 군살 없이 뻗어 있는 소나무를 보면 눈으로 보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안면도는 습기가 적당하고 온화한 기후 속에 잔돌이 적은 토지라 덕택에 소나무가 곧게 자라고 키가 높게 올라간다. 그래서 오랜 세월 궁궐의 재목, 배 만드는 목재로 쓰인 것이다. 소나무 숲은 바쁘고 고된 노동을 떠나 몸과 마음을 비우고,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소나무가 많은 솔밭에서 얼굴에 반점이 있는 섬말나리꽃 냄새를 맡으며 온갖 생명체를 만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 천연 항생물질인 피톤치드(phytoncide) 소나무 산림욕은 문명에 지친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당송 팔대가의 한 명으로 저 유명한 蘇東坡(1036~1101)가 어느 날 여산 동림의 흥룡사에 있는 당대의 고승 상총 선사를 찾아가 설법을 청했다. 그러나 선사는 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유정설법만 듣고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소동파를 크게 꾸짖었다. 스님은 소동파에게 눈으로 보이는 것밖에 못 보고 귀에 들리는 것밖에 못 들으며 진정으로 ‘소리 없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채찍질한 것이다. 소동파는 선사의 그 말에 갑자기 가슴이 막막해졌다. 정신을 잃고 돌아가는 길에 문득 큰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서 비로소 시냇물 소리를 온전히 듣게 되었다. 그 순간 소동파가 마침내 ‘무정설법’의 도리를 깨닫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고 한다.

계성변시장광설 (溪聲便是長廣舌)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 (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 (他日如何擧似人)

시냇물 소리는 부처님 설법으로 들리고,
산을 보아도 부처님의 淸淨身으로 보이니,
하룻밤 사이에 팔만 사천 법문을 깨달았도다.
뒷날 이 이치를 어떻게 남들에게 말해주겠는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천초목이 그대로 청정법신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원래 유정설법이란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말로써 하는 설법이고, 무정설법이란 돌멩이, 풀 한 포기, 나무나 산같이 우주 만상이 모두 설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안면도의 산에서 자라는 수종의 62%가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사면이 검푸른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면에서 내가 생각할 때 ‘안면암 가는 길’과 ‘安眠庵’은 최상의 무정설법을 깨달을 수 있는 도량이 아닌가 한다. 조동종을 창시한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가 ‘무정설법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들어야 알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앞으로 무수한 ‘秤(칭)가(깨닫기 전의 소동파)’를 자처하는 세속 도시의 겸손한 나그네들이 안면도에 드나들어 정신 건강이 크게 진작될 것이다.

(안면도엔 소나무가 많다/ 하재일 시인)

안면도 자연휴양림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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