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작가, 전 지수중학교 교장)

퇴직 이후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홀로 있으면 모든 관심이 나에게 쏠린다. 심지어 내 호흡 소리까지 듣게 되고 온몸에 일어나는 소소한 자극에도 몹시 신경이 쓰인다. 동시에 마음을 돌이켜 보는 시간도 많아진다. 이내 회한과 탄식에 빠진다. 하지만 용렬한 존재인 내가 어찌 회한이나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절대적인 시간의 연속선 위에 서 있어서 불가능하지만, 돌이키고 싶은 일은 또 얼마인가? 그런 복잡하고 이상한 날들이 이제 보름을 넘기고 있다. 한 편, 어찌 생각하면 이 시간은 내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를 돌이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아프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통증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설령 돌아보고 문제점을 발견하여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무시하기 일쑤다. 아프기 때문이다. 인지상정이다.

노자께서는 이런 사실을 아셨는지 진실로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고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이렇게 치켜세우고 있다. "知人者, 智 自知者, 明. 勝人者, 有力 自勝者, 强. 知足者, 富 强行者, 有志. 不失其所者, 久 死而不亡者, 壽. (지인자, 지 자지자, 명. 승인자, 유력 자승자, 강. 지족자, 부 강행자, 유지. 불실기소자, 구 사이불망자, 수.)" (도덕경 33장 전문)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밝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다.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다. 억지로 행하는 사람은 의욕만 있다. 자기 자리를 잃지 않은(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오래가고, 죽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장수하는 것이다."

맨 처음 등장하는 ‘지인知人’의 대구對句로 쓰인 ‘자지自知’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의견들을 피력한다. (이미 출판된 여러 종류의 '도덕경'에는 많은 학설들이 있다.) 그 의견들에 유학幼學인 나의 의견을 첨언하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知人과 마주하는 말은 따지고 보면 ‘지기知己’ 정도일 수 있는데 왜 自知라는 단어로 표현했을까? 노자께서는 아마도 ‘스스로’라는 말속에 담긴 거대한 함의를 이해하기 바랐던 모양이다. 나는 그 답을 『장자』에서 찾았다.

『장자』 대종사 편에 ‘견독見獨’과 ‘조철朝徹’이라는 표현이 있다. ‘남백자기南伯子葵’(제물론과 인간세의 그 남백자기와 동일 인물)가 ‘여우女偊’에게 도에 대하여 묻자 여우는 도가 이루어지는 단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즉 외천하外天下→외물外物→외생外生→조철朝徹→견독見獨→무고금無古今→입어불사불생入於不死不生. 여기서 중간쯤 있는 ‘조철’과 ‘견독’의 경지가 바로 도덕경에 있는 自知의 의미에 가깝다. (견독은 홀로 자신을 보는 것이며, 조철은 아침 해가 떠 오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참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쩌면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신을 알기는 어렵다. 내가 이즈음 느끼는 마음과 이 글에 있는 경지는 완전히 다르고 동시에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것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아마도 이런 구조 속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여 최근의 마음을 졸시로 표현해 본다.

何不朝徹後至見獨* (하불조철후지견독) 조철하여 견독에 이르러야 함

尋思無善根 (심사무선근) 깊이 돌아보아도 선근은 없고,

頓悟遠渺茫 (돈오원묘망) 깨달음은 멀고 아득하여라.

冗漫加暗愚 (용만가암우) 쓸데없는 말로 어리석음만 더하니,

斬猫到坐忘*(참묘도좌망) 고양이를 죽여 좌망을 이르기를!

.

* 하불何不: 영어로 치자면 Why don’t you~ 정도의 표현이다.

* 참묘斬猫: 유명한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 천泉이지만 남전 선사를 지칭할 때는 전으로 독음한다.) 화두를 용사함.

* 좌망坐忘: 장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상태. 조철을 거쳐 견독에 이른 상황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