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사들이 너무나 싫어하는 학생부 쓰기 중 특히 ‘과목별 세특(과목별 세부 능력 특기 사항)’은 교사들의 방학을 유린하기 일쑤다. 최근 이 과목별 세특 쓰기에 A.I. 가 사용되면서 그나마 교사들의 일손을 좀 들어주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A.I. 를 이용한 과목별 세특 쓰기가 유행하면서 이제는 A.I. 를 사용하지 않는 교사가 없을 정도다. 일은 편해졌으나 몹시 찜찜하다. 과연 A.I. 를 이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혹은 교육적인지 고민이 앞선다.
본래 과목별 세특의 의도는 수업 활동의 충실화에 있었다. 수업 중에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수업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을 사전에 작성해 두었다가 학기말 학생부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지금 주당 수업 시간 수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퇴직을 일주일 앞둔 나를 포함해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2학기 주당 평균 수업 시수는 16시간에서 18시간 심지어 특정 과목은 20시간이나 된다.
일주일 총 수업 시간을 감안한다면 거의 살인적인 수업 시간이다. 50분 수업을 하루 최소 4시간 이상은 해야 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수업 중에 있었던 사실을 수업을 마치고 학생 한 명 한 명의 수업활동을 복기하여 기록하려면 하루 1시간 이상의 수업은 무리다. 일주일 수업으로 치면 6시간 정도면 가능하다. 그런데 현재 이 땅 고등학교 어디에도 주당 6시간 수업은 없다. 하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A.I. 를 이용한 세특 쓰기다. (내가 찾아 본 바에 의하면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모든 학생들의 과목별 세특을 쓰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이것이 바람직한가? 좀 더 정확하게 A.I. 를 이용한 세특 쓰기가 세특의 본래 취지는 고사하고 고등학교 교육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이제 정년을 일주일 앞둔 나는 교육현장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거대하고 무서운, 그러나 매끈한 얼굴의 A.I. 를 본다. 사실 A.I.로 쓰는 세특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작성한 세특을 보고 대학은 아이들의 수업 활동과 상황을 제대로 판별할 수는 있을까? 이렇게 A.I. 가 개입된 세특이, 학생부가 넘치면 오히려 세특 무용론이 나오고 나아가 학생부 전체의 무용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을 누군가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나 역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여 생각해 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모든 일의 바탕에는 철학 없는 교육 정책이 있다. 조삼모사의 정책으로, 주먹구구의 정책으로 21세기 미래교육,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할 우리 아이들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철학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위한 그리고 아이들의 삶을 위한 철학이 절실한 시대가 된 것이다. 퇴직 이후에 그 철학적 기반을 구성할 책임을 스스로 지고 다양한 고민을 통한 주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