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황희(고전연구가)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청풍과 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청빈한 선비의 삶에 헛된 생각 아니하니

한평생 즐거이 지냄이 이만한들 어떠한가. -정극인, 상춘곡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외로움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삶에는 늘 빈구석이 존재하고 인생은 그것을 채우는 재미로 사는 것이다. ‘행운’과 ‘불운’은 한 사실의 두 얼굴이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면 행운이라 하고 불리하면 불운이라 한다. 그러나 ‘사실’은 특정인에게 우호적이지도 비우호적이지도 않다. 니체는 말하였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니체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관점, 경험 및 문화적 맥락에 의해 형성된 해석이라고 제안하였다. 이 말은 단순히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곧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개인의 해방과 창조성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꽃이 작다고 덜 예쁘고, 크다고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주관적 해석의 영역이다. 구상 시인의 시에서처럼 “채송화는 앉아서 피고 코스모스는 서서 핀다. 만물은 제 분수를 다할 때 더없이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므로 민들레가 굳이 장미를 부러워해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호오(好惡)의 감정이 갖는 해석의 영역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꽃이 봄에만 피는 것은 아니다. 국화처럼 가을에 피는 꽃도 있고 더러는 매화처럼 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사과나무와 떡갈나무는 자라는 속도가 서로 다른 법이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굳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마님의 따가운 눈총을 뒤로하고 나는 ‘나의 봄’을 만나러 조용한 기도처를 찾아 태평양 어느 섬의 깊은 바다를 찾아 나섰다. 아뿔사(我不思)~, 그러나 이곳은 봄이 먼저 찾아온 곳이 아니라 만년 상하(常夏)의 나라이다. 어딘지는 결코 비밀이다. 성불을 위한 고육책의 무단가출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머무르며 떠나지 않는 겨울이란 없고, 때가 되었는데도 찾아오지 않는 봄이란 없다.” 출처는 미상이다. 비행기 안에서 불현듯 이 말이 생각나 직업병인 교정 본능이 발현되어 무심코 한역으로 끄적여 보았다.

불유영유이불리동 - 不有永留而不離冬

불유시지이불귀춘 - 不有時至而不歸春

“작은 틀 안에 갇히지 말자.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오늘 종일토록 이문재의 ‘오래된 기도’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기도하는 중’이다.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고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가며 기도하고 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깊은 바다 심층에서 생면부지의 물고기들과 마주하며 기도하고 있다. 자연의 무한한 신비와 조화옹의 섭리에 경탄하며 기도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우주의 숨결을 느끼고,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라고 하였던 윌리엄 브레이크처럼 깊은 바닷속 심해의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의 신비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다. 지금 내 손 안에 펼쳐진 무한을 한순간 영원히 잡고 있다. ‘태극(太極)이 무극(無極)’이었음을 경전이 아닌 무중력의 세계에서 비로소 깨닫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고 순간이 곧 영원임을 공감각적 체험을 통해 내 안에 되새김질하고 있다.

서태평양의 바닷속 그 깊은 해저에서 바다의 속살을 보았다. 여인의 속살보다 더 신비롭고 경이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에 헤어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한 뼘도 안 되는 내 눈앞에서 거북이가 나와 함께 숨을 쉬고, 수 천 수 만의 잭 피쉬 떼들이 나와 함께 자유로운 유영을 한다. 일찍이 상상이나 해 보았던가~. ‘울긋불긋 꽃 대궐’과 오복동천의 낙원은 보았어도 기암괴석의 산호초와 이름 모를 온갖 물고기 떼들이 노니는 수중궁궐은 상상조차 못 해 보았던 태초의 신비이다. 그 사이에서 상하 사방으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내가 대기권 밖의 외계인이 된 기분이다.

인생은 모두 시간 앞에서 유한한 존재들이다. 내가 만일 이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고 어제 죽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억울한 인생이었을까? 오늘이라는 이 시간은 어제 죽은 인생이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나의 하루하루는 어제 죽은 이의 기적이고 천금보다 귀한 부활의 인생인 셈이다. 두 눈에 생생하게 담아 두었던 오늘의 감동과 감격은 차마 필설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수중 카메라가 없어 남의 것을 빌다 보니 내 느낌을 다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기어이 쓸개를 팔아서라도 하나 장만해야겠다. 그러나 오늘의 깨달음도, 행복도 모두 순간의 추억이겠지~, 돌아가면 나는 아마 마님에게 거의 뒤질 것이다. 마님이 두려워 어쩌면 영원히 못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돌아가서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아무렴, 그것도 ‘팔자소관’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