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2025년 2월 18일, 새 학기를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나는 이제 정확하게 6달 12일 후면 오랜 교직 생활을 멈추게 된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복기해 본다.
업무분장이라는 제도는 자주 이야기하지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단 한 번도 모두 비운 적이 없다. 늘 그 이전 연도 판 위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2025년 우리 학교 업무분장은 1948~2025년 연속선상에 존재한다. 2019년 교장이 되어 2020년 학교 업무분장을 내 손으로 짜면서 나는 최초로 모든 것을 떨어내고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했다. 2019년 학기말, 약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선생님들은 참 힘들었겠지만 하나씩 하나씩 필요 업무만을 정하고 그것을 아주 공정하게 나누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장인 나의 담당업무였다.
나는 그 이듬해 2020년부터 2023년 그 학교를 떠나 올 때까지 입학식, 졸업식, 교외 체험학습, 각종 공모사업, 그리고 행사 사진촬영이 업무였다. 그리고 기록되지 않는 업무는 국화 키우기, 학교 화단 조성(계절별) 등이었다. 관련된 업무의 공문서 및 수, 발신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선생님들의 업무는 매우 자연스럽게 조정이 되었고 4년 동안 학교는 업무 관련 잡음은 단 하나도 생기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능동적으로 업무를 추진하시는 것을 보았다.
교장은 수업이 없으니 당연히 여러 업무를 담당해도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다. 아마도 현직에 계시는 많은 교장들이 이 문제에 시비를 걸 수 있을 것이다.(공모 교장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장일 당시 인근 학교에서 비슷한 비난을 간접적으로 들었지만 내 앞에서는 아무도,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논어를 읽다 보면 인상적인 말들이 너무나 많지만 그중에서 나는 이 말이 공자 사상의 핵심에 가깝고 동시에 동양인의 정서에 적합한 말이 아닐까 싶다. 논어 안연 제12에 “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 즉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베풀지) 마라! 좀 더 확대하면 자신이 타인에게 존중받으려면 먼저 타인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비슷한 말이 있다. 마태복음 7장 7~11절에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이 있다.
논어와 비슷하나 차이가 있다. 성경의 내가 대접한다(대접받고 싶다)는 말은 내가 그 상황을 또는 그 일을 좋아한다는 의미인데 문제는 내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타인은 비록 싫어할지라도 강력한 사람이 대접해 준 대로 똑 같이 힘 없는 사람이 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수평의 상태에서는 이 말씀이 아름다우나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극단적으로 확대되면 제국주의적 사고로 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아마도 15세기 대 항해시대 이후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벌인 일이 이 말씀에 기초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내가 좋으니 너희도 좋아야 된다는 논리로 해석될 우려도 있다는 말이다. (반대 있음)
그러나 논어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힘 있는 자의 희생이 요구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힘 있는 자가 가져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것이 인仁이다. 인은 다름 아닌 공감능력이요, 인간(상대)에 대한 근본적인 배려다.
업무분장의 기본은 학교에서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로 향하는 배려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이 땅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교 업무 분장의 분란(물론 대 부분 유려하게 조정되지만)은 많이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가장 힘 있는 자는 당연히 학교의 교장이다. 방치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학교장들이여! 스스로 일을 감당하는 것이 존중과 배려의 기본이다.
Christ in the Wilderness 1872. 180 ×210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van Kramsk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