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총각 때 잠시 자취를 한 적이 있다. 평일이었지만 집 앞 영화관에서 마지막 회차의 영화를 감상할 자유가 있었던 시절, 그 당시 많은 논쟁으로 뜨거웠던 한 영화를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영화가 다 끝나고 백화점 꼭대기 층에 있던 영화관에서 자정이 넘긴 시각 적막한 도로로 내려와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문득 예수님이 안타깝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재 어엿한 개신교 목사로 활약하고 있는, 당시 신학 대학원생인 죽마고우에게 전화했다. 그도 아직은 총각이었기에 가능한 통화였다.
“만일, 예수님이 딱하고 측은해서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래도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냐?”
“그게 바로 크리스천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다!”
그 순간, 기독교인이 되는 줄 알았다. 참, 그때 본 영화는 바로 ‘다빈치 코드’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별다른 종교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인적 사항을 적을 때면 종교란엔 언제나 없을 ‘무’ 교이다. 거기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의 입장과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한 종교 활동을 하지 않은 비신앙인의 의미가 모호하게 들어있다. 신이 있다고 생각해도 종교인이 아닐 수 있다. 그만큼 종교의 종류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아이들에게 대학교 학과를 설명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세계 대학 랭킹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지를 소개해 주곤 한다. 세계 3대 대학평가 기관 중 영국의 QS를 기준으로 살펴보는데 우리나라 상위 랭크 대학들의 경우를 보면 유독 종교 단체에서 설립한 대학들이 많이 보인다. 아직은 국가가 돈이 없을 때, 신문물을 전하며 교육 기관에 투자한 측면에서 종교 단체의 대학 설립은 의미가 컸다. 이런 배경과 함께 흥미 삼아 아이들에게 확인하고 알려준다. 개신교에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세대학교,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등이 있고 천주교에는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가 있다. 불교를 대표하는 학교는 동국대학교이다. 그밖에는 명지대학교, 배재대학교(개신교), 금강대학교, 위덕대학교(불교), 원광대학교(원불교), 대진대학교(대순진리회), 선문대학교(통일교), 삼육대학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등의 대학들이 종교 단체에서 만든 학교이다.
대학 진학을 지도하던 시절의 경험인데 동국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이 집안의 반대로 등록을 하지 않고 다른 대학을 간 일이 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학생이라 원서는 썼지만, 합격 통지를 받으니 고민이 컸던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우리 지역에서 가까운 대진대학교는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중 꺼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정반대로 불교 집안의 학생이 연세대학교 합격 통지를 거부한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종교 단체의 대학도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종교의 특성에 따라 학교 선택의 양상이 달라지는 모습들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고 역시 종교 단체에서 설립한 학교가 많다. 가장 많은 개신교의 경우 대학을 포함하여 전국 234개 학교법인과 496개 미션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대구의 협성교육재단의 경우는 경북여자상고, 대구제일고 등 학교 13개를 두고 있다. 불교의 경우는 초중고 대학까지 총 60개교, 가톨릭은 86개를 두고 있다(뉴스앤조이, 2017.08.16.). 종교가 교육과 만나는 모습이다. 대학의 경우 아직도 종교 수업을 의무로 두고 있는 학교가 있다. 연세대학교를 대표한 개신교 학교들에선 채플 수업을 들어야 하고, 동국대의 경우는 ‘불교와 인간’이나 ‘자아와 명상’의 수업을 들어야 한다. 가톨릭대학의 경우도 ‘인간학’, ‘영성’ 수업을 들어야 한다. 종교적 신념이 강한 학생이라면 학교 선택에 고려할 사항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종교는 무엇일까? 어릴 때 사회과 부도에서 기억하는, 전 세계 국가별 대표 종교 현황 그림에는 우리나라는 당시만 해도 불교 국가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2022년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가 20%, 천주교가 11%, 불교가 17%, 기타 종교가 2%이고, 종교 없음이 51%에 달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면 기독교 인구가 31%가 되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이다. 그러나 더 높은 비율을 보아야 한다. 바로 51%에 이르는 ‘종교 없음’이다. 우리나라는 사실 ‘무교’ 국가이다. 이를 통해 더 이상 우리나라를 대표할 종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수치는 불행일까, 다행일까?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을 말한 엘리아데의 주장을 고등학교 수업에서 다뤘었다. 일상적인 삶 자체가 언제든지 성스러움의 드러남, 즉 성현(聖顯)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종교적 지향성을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으로 파악한 그는 우리의 삶이 다분히 종교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호모 사피엔스의 대규모 협력을 위한 허구적 신념 체계로써의 종교(유발 하라리)와 같은 얘기도 있다. 모두가 해당 종교의 신앙인들이 들으면 불편할 주장들이다. 믿음의 세계는 분석과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대립하는 종교적 신념들이 토론과 이해의 과정으로 서로 양해하고 설득하는 성공적 사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가 아닌 보통의 생활에서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 설득들이 때로는 힘과 세를 앞세우고, 직위와 권위를 활용하며, 전문성이라는 후광으로 상대를 굴복시킨 것은 아닐까? 만족하지 않은 동의와 인정을 이해와 타협이라고 포장하며 덮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완전한 설득의 모습들에서 종교가 현실화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1984년부터 2021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종교 없음’의 인구 비율은 최저 47%(2004년)를 보이다가 2021년 60%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종교를 원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충분히 종교적이다. 지역, 계층, 세대, 성별의 갈등은 이미 종파의 그것이 되었고, 현실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는 수시로 종교적 인간들의 사회가 보인다. 엘리아데가 인정할 만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종교(宗敎)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인과 예와 같은 말 그대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그 어느 시절보다 ‘정치적’인 종교인들의 활동 속에서 그들이 행하는 끊임없는 분열과 파괴의 주장들이 그러한 가르침을 무색하게 한다. 선동하는 종교인들의 발언은 차마 애들이 배울까 무서운 내용들인데 그들은 이미 ‘설득’의 영역을 넘어선 지경에 이르렀기에 나 같은 비 종교인은 그저 막막할 뿐이다. 분명히 ‘종교 없음’의 인구가 압도적인 나라임에도 흔하게 들리는 고위급 인사들의 무속 신앙에 대한 맹종과 홍보 영상이 500만 조회수가 넘는 대형 기독교계의 사이비 종교가 공존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영화 ‘다빈치 코드’를 본 후 예수님이 안타깝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가 가르쳤던 사랑과 평화의 세계가 더 이상 구현되지 못하는 현실의 복잡한 모습과 인간들의 한계 때문이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희생하였다는 그가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볼 때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만일 너무 놀라셨다면, 다시 한번 큰 가르침을 내려 주시길 기도한다. 광장에서, 법원에서, 의회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인간들의 탐욕과 불의가 뒤섞인 그 모든 곳에서.
출처 : FREE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