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아이들이 상담할 때 묻는 질문 중에는 제가 지금 위치에서 고등학교에 가면 몇 등 정도 해요? 또는 대학은 어디 정도 갈 수 있어요? 라는 내용이 많다. 등수에 대한 관심과 걱정에서 나온 질문들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학급에서 몇 등인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중‧고등학교 성적표에 등수가 안 나온다. 고등학교의 경우 교과별로 학생이 받은 원점수와 과목 평균 그리고 표준편차가 제시되고 A부터 E까지의 성취도와 수강자 수 그리고 최종적으로 등급이 표기되면 끝이다. 유튜브를 보니 한 수학 선생님이 표준편차와 평균, 그리고 원점수를 가지고 대략적인 등수를 알아내는 방법을 알려준 게 있지만 그런 수고로움으로 어떻게 한 과목의 석차는 알 수 있다손 쳐도 이른바 주요 교과니 전 과목을 합한 석차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물론 고등학교에서는 학생 전체의 점수를 알고 있으니까 적당한 프로그램을 돌려 알아낼 방법이 있다. 대학별로 학교장 추천 전형 등에 활용하기 위해 석차를 내고 추천 대상자를 선정해야 하니 필요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다. 중학교의 경우는 아예 표준편차 없이 과목별 원점수와 평균, 성취도와 수강자 수만 제시된다. 그래도 학교 차원에서는 아이들의 석차를 알 수 있다. 단, 아이들에게 공개를 안 하는 것이 원칙이다.
중3이 된 아이들이 경기도교육청 내신 산출 점수 200점 만점에 해당하는 가내신을 담임 선생님께 받아서 들고 온다. 만일 2학년 두 개 학기의 점수만을 가지고 산출한 가내신이라면 경기도 고입정보포털 사이트에 가서 지금까지의 점수를 입력하고 3학년 성적은 같은 점수, 또는 임의의 점수를 입력해서 2학년 때와 같은 성적일 경우의 3학년 말의 점수와 거기서 몇 점을 맞아야 얼마를 올릴 수 있을지 등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석차는? 만일 현재 점수로 3학년 말까지 간다면 어떨지 올해 졸업한 선배들의 총점 대비 석차를 참고삼아 비교해 준다. 물론 해마다 성적 분포가 달라진다는 한계는 있지만 얼추 학급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는 용도로만 쓴다.
만일 우리 학교에서 학급 등수가 몇 등이라면 고등학교에서는 몇 등이나 할까? 아이들만 궁금한 게 아니다. 고등학교에 있었던 기억을 더듬어 중학교 성적이 지역 일반고에서 학급당 몇 등정도 할지 대략적으로 예상해 본다. 우리 학교의 경우 상위권 학생들이 특목‧자사‧자공고 등으로 빠져나가면 그 빈자리를 빼고 난 등수로 인근 일반고의 석차를 가늠해 본다. 물론 고등학교 공부가 중학교와 크게 다르다는 점, 중학교 성적이 무색할 정도로 고등학교 성적은 변화가 많이 일어난다는 점을 인정하고 아이와 분석해 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학생부 교과 전형의 대학별 백분위를 따져 아이가 현재 석차로 가능한 대학들도 그려본다. 대충 그려본다지만 우리들 머릿속에 있는 그 서열이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하는.
중학교에서 공부 잘한 아이가 고등학교에서도 잘하고 이후 좋은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높은 거야 말해 뭐하랴. 등수에 관한 집착과 부작용을 없애고 비교육적 풍토를 없애기 위해 성적표에 명기하지 않는다지만 세상은 이미 철저한 석차 사회인지라 그걸 끝까지 감추려는 공교육의 노고는 애처롭고 힘겨워 보인다. 그래서였는지 아이들과 등수를 얘기하다가 문득 내 인생은 과연 몇 등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노력해서 성적을 올리고 자신만의 성취를 얻었다면 석차나 대학은 차후의 문제고 그 사실만으로도 잘한 거라고 강변하지만 세상은 그런 성취에는 관심이 없으니 어른인 나에게도 이런저런 기준으로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고 있잖아’ 할 순 없겠다는 느낌에서 든 의문이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같은 동갑내기 중에 나는 몇 등 정도로 살고 있을까?
살고 있는 터전이 자본주의인 곳에서야 일단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정도로 석차를 따질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기준으로 내 등수를 보면 결코 우등한 위치라고는 할 수 없을 텐데 서글픈 건 그다음 이어질 수많은 합리화와 희망 고문들이다. 예를 들어 일정 정도의 자산 규모가 넘어가면 만족도가 향상되는 정도는 완만해진다며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지는 않다는 심리학 연구를 들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모습에서 얻는 위안이 그렇다. 부유한 정도로 삶의 등수를 매긴다면 한없이 우울해질 테니까 곧이어 다른 기준을 희망차게 찾아본다.
이제는 일터에서의 만족과 보람을 들 수 있겠다. 내 분야에서도 아이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받으며 학교와 동료 교사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인정을 받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의 석차를 어떻게 매길 수 있을까? 교육감 정도가 되면 1등일까? 그럼 교장‧교감 선생님도 못한 평교사인 나는 과연 몇 등? 아니요, 그게 아니고 진로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동료 교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라고 누군가 또 위로하려 할 것이다. 그래봐야 그저 신도시의 작은 중학교에서 소박한 삶에 만족하는 교사일 뿐, 이 역시 우등한 등수에는 없겠다는 결론이다.
그다음 들 수 있는 가족 안에서의 사랑과 평안은? 친구들과 선후배 등 인간관계에서의 만족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내 몸의 건강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석차를 매길 수 있는 기준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아무리 기준들을 떠올린다고 해도 내가 남들보다 특출나게 우월하다는 어떤 기준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무탈하게 보통의 정도로만 유지하는 정도라면 우등한 석차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고 하면서 그래도 ‘대과(大過) 없는 삶이 최고다’라는 말로 달래며 위로해야 한다. 허탈한 등수 찾기에 힘들어하다가 이런 등수 찾기의 허무함을 인정하지 않고 집착한다면 그 삶이 어떠할지를 역으로 생각해 본다.
2024년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 문학상에 우리 작가 ‘한강’을 꼽았다. 그녀의 수상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평가하며 축하하지만 누군가 “올해 글쓰기에서 세계 1등 하셔서 축하해요”라고 한다면 그 발언에선 참기 힘든 저열함이 느껴질 것이다. 등수가 갖는 함의가 저렇게나 비좁고 허약하다. 어쨌든 평가해서 내린 결과가 아니겠냐고, 그게 등수를 매겨서 한 거라면 1등이 수상자 아니겠냐고, 일견 옳게 느껴지는 반론이 그러나 충분치 않은 건, 저 위의 수상자는 그 상을 목표로 글을 쓴 게 아니고, 다른 경쟁자들을 의식하거나 억누르고 얻은 결과가 아니며 수상을 한 이후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손을 놓아버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등수를 매기는 활동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석차가 갖는 결핍과 공포를 떠올릴 수 있다. 그건 남을 의식하며 끝내 이루어야 할 무언가여서 그 과정을 함께한 이들에게 오직 1등을 제외하고는 허탈감을 줄 수밖에 없는 개념이란 걸 말이다. 비로소 나는 내가 몇 등의 삶을 살고 있는지의 강박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수상에서 드는 또 하나의 고마움이다.
노벨상 수상을 기념하며 차분하고 잔잔한 그녀의 톤으로 등수를 배제한 인생의 행복을 속삭여 본다. ‘있잖아, 사각거리며 뽀송하고 새털처럼 가벼우며 따뜻한 그런 이불을 덮으면 좋겠어. 친구들과 흉금 없이 웃고 떠들며 해지는 바닷가 어느 횟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놀았으면 좋겠어. 어렵고 고된 객지 생활 중에 저 멀리서 십여 년 동안 못 만났던 엄마가 찾아오자 뛰어가서 안기는 장면 속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동아리 활동 중에 오랜만에 진로 관련 영화로 「빌리 엘리어트」를 보았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빌리의 엄마가 세상을 먼저 떠나며 남긴 편지글이 나온다. 주인공은 18살이 되면 읽어보라고 엄마가 한 당부를 어기고 이미 수없이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글에서 등수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겠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은 문구를 남기며 글을 맺는다.
‘엄마는 너를 알았다는 게 자랑스럽고, 네가 내 아들이라 자랑스럽단다. 늘 너 자신으로 살렴. 영원히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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