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교사)
어느 날 큰딸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복을 입은 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아이의 교복은 하얀 블라우스에 분홍색 리본을 달고 깔끔한 블레이저를 걸친 상의와 체크무늬 플레어 치마의 하의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얇은 스타킹을 덧대어 입었는데 나를 닮은 굵은 다리도 날씬해 보인다. 귀찮을 만한 데도 매일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가는 아이에게 물었다.
“가끔 편하게 체육복을 입고 가는 게 어떠니? 공부하는데 불편하진 않아?”
아이가 답한다. “단정해 보이는 게 좋아. 체육 시간 빼고 체육복 입고 오는 애들은, 알잖아 아빠! 애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해”
등교 맞이를 하는데 한 아이가 다가온다. “선생님, 깜빡 잊고 실내화를 교실에 두고 와서 지금 없는데 어쩌죠?” “오! 그럼 올라가서 꼭 갈아 신고, 담부턴 잘 갖고 다니자~!”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남학생 몇 명이 올라탄다. 그중에 한 명이 교통카드가 망가졌는지 몇 번을 시도 끝에 난처해한다. 옆에 친구들이 대신 내려고 하는 찰라 맘씨 좋은 운전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괜찮으니, 오늘은 그냥 타라~” 아이들은 연신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린다. 녀석들은 모두 교복을 잘 갖춰 입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깜찍한 모습이었다.
전남 해남군에서 2015년 5월에 중·고등학생 전체의 교복비 지원을 위한 정책 협의를 요청한 이래로, 그해 8월 성남시에서 시도하여 정부와 갈등을 빚고 큰 이슈가 되었던 ‘무상 교복’ 지원은 어느덧 전국 단위로 확대 시행되고 있다. 현재 경기도는 신입생에게 40만 원의 현물 지원으로 무상 교복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업체 선정을 위한 기준을 마련하고 예산 배정을 한 후 전자 입찰을 통해 최저가 입찰을 실시한다. 입찰과 재정적 마무리는 행정실에서 한다지만 업무의 시작부터 끝이 없는 사후 처리까지 한 부서의 담당 교사가 맡아서 하는 나름 지난한 업무가 교복 관련 일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입학하면서 국가의 예산으로 교복과 생활복 및 체육복 등을 받는다. 정치적 유불리를 고려한 선심성 정책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어도 국가가 아이들에게 3년 동안 입을 옷 한 벌을 제공해 준다는 건 이만큼 성장한 공동체의 여력을 느끼게 하는 뿌듯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처음에 교복으로 시작된 교내 복장 기준이 생활복에서 체육복까지 확대되는 허용의 과정이다. 나는 딸이 없다. 저 위의 상황은 교복을 잘 입고 다니는 문화가 익숙한 상황을 그려본 상상이다. 이상적인 상황을 떠올렸으나 비상시 대처 요령 팸플릿 속에 웃고 있는 그림들처럼, 모든 게 가공된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현실은 180도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교복을 입지 못했다. 제5공화국 때 중·고등학교를 보낸 사람들은 나처럼 사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남학교에 다녔기에 청바지와 티셔츠로 대충 입고 다녔고 머리는 분명히 자율화였지만 교련 과목을 담당했던 담임 선생님의 영향으로 짧은 ‘스포츠’형을 하고 다녔다. 요즘 애들이 부러워할 시절이다. 바로 완전 사복이 가능한 진정한 자유의 시대! 하지만 결핍은 부러움의 근원이다. 우리 세대는 일제 스타일의 제복(가쿠란)과 선원(세일러)복을 탈피한 정장풍의 교복을 입은 후배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앨범 촬영이나 특별한 행사일을 빼곤 학생들이 모두 교복을 갖춰 입는 모습은 거의 사라진 풍경이다. 아이들은 사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고 수시로 조른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등교 맞이를 하면서 아이들의 교복을 깐깐하게 지도했던 교사였다. 일전에 학생부라 불리던 부서에 근무할 때는 더욱 엄격한 지도를 했었다. 아이들은 교복 입기를 학교에 다니면서 가장 크고 부담스러운 규칙으로 여긴다. 그 규칙에 예전엔 교복 개조로 맞섰고, 사복 섞어 입기로 도전했으며, 생활복이란 창조적 타협점을 낳더니, 이내 체육복 등교 허용을 관철해 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학교가 교복 지도라는 행위를 상실해 버렸다. 이제 선생님들의 작은 소망은 그저 체육복이나마 학교가 정해 놓은 복장을 입기를 바라는 것이다. 체육복에도 사복을 섞어 입는 무근본 패션이 교복으로 저항 중이기 때문이다.
교복 지도에는 선생님들 가운데에도 이견이 많다. 어차피 이상적인 상황은 어려울 테니 지도하면서 겪는 갈등을 무의미하게 보고 없애자는 의견이 있고, 그래도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게끔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나는 줄곧 후자였다. 학생부에서 근무하던 십여 년 전 아직은 교복을 손수 사서 입을 때, 하도 개조가 많아서 교복 입는 규정을 정하는 교육 3주체 회의를 주관한 적이 있다. 치마는 아무리 줄여도 무릎 위를 넘지 말아야 하고 추운 날에 오리털 등의 파카를 입을 땐 재킷을 꼭 입은 후에 입을 것 등 여러 규정에서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학생 대표단의 설전이 오갔다. 학생들은 더 자유롭게 입겠다 했고 교사와 학부모는 반대했다. 그 덧없는 논쟁에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한마디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우리 학교는 교복을 없애는 게 어떨까요?” 참석자들이 모두 경악했다. ‘교복이 있으므로’ 인한 소모적인 논쟁이 참기 어려워 진심을 담아 말했더니 의외로 반대했던 건 학생들이었다. 역시나 예상되는 결핍은 집착을 일으킨다. 갖고 있던 걸 빼앗기기는 싫었는지, 아니면 교복이 없으면 진정 형편없는 학교로 비칠까봐 불안했던지 아이들은 그건 싫다고 했다. 그래서 난 그 학생들에게 한 번 더 제안했다. “그렇게 교복을 원하면 그 학생은 교복 같은 사복을 입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 이후론 회의 때 나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멀리 있는 분들은 세밀한 학교의 문화와 풍경이 아직도 자신이 다닐 때와 같은 줄 안다. 디테일은 해가 다르게 달라진다. 요즘은 수업을 시작하면서 학생들과 구령에 맞춰 인사하는 게 거의 없어졌다. 선생님이 교실이 들어와도 못 본 척하는 아이들이 많다. 애들에게 인사를 받는 게 뭘 그리 대단한 거라고 다 무시하고 싶다만 어디서부터 수업의 시작점을 찾아야 하는지 궁금한 일부 선생님들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아이들은 그제야 화답한다. 그 일부 선생님 중에 나도 포함된다. 수업이 끝나면? 역시 인사 없이 그냥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시작과 맺음이 없는, 그래서 정처 없고 부질없는 마음은 어딘가 기댈 곳을 찾는다. 나의 경우는 즐거운 수업을 끝내면 다 같이 박수를 친다. 그리고 헤어짐의 인사도 내가 먼저 한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담임을 하면서 청소 시간에는 늘 아이들과 함께 청소했다. 이걸 좋게 보는 아이들이 많았고, 초창기에 일부 선생님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아이들 청소는 그저 요식행위로 임한다. 어쩔 땐 청소 후에 아이들 없이 한 번 더 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청소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교실은 지저분해지고 걱정이 큰 사람이 먼저 치워야 한다. 청소 지도도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주장이 있다. 화장실 청소와 교무실 청소 당번은 없어진 지 오래고 이제 교실 청소도 용역 업체에 맡기자는 의견이 많다. 조만간 그렇게 될 것 같다. 아이가 잘못했다고 벌을 세우면 안 되는 건 하도 언론에 많이 나와서 잘 알려져 있는 변화다.
공짜로 교복을 주니까 잘 안 입는 거 아니냐고 역시 제 돈을 주고 사야 귀한 줄 안다고 하면 무상 교복 이전에도 아이들이 교복 입는 걸 힘들어했다는 경험에 근거해 그건 틀린 주장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런 와중에 지키기 싫은 수많은 규정과 약속 들 가운데 교육적 의미를 담아 고수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불평과 저항들이 버거워 지켜야 할 것들을 편의에 따라 외면한다면 그것들을 유지하는 건 더욱 힘들어질지 모른다. 일전에 너무 더운 날 교복 바지를 잘라 반바지로 입고 온 남학생이 있었다. 담임으로서 그 아이에게 규정에 어긋나는 교복 착용을 지적했지만, 그날 아이가 입고 온 바지는 너무 예뻐 보였다. 그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 분야의 오랜 관심과 준비로 그 해에 유명 대학의 패션 디자인과에 합격했다. 그때의 행위는 분명히 권위에 도전한 일탈이었지만 또한 새로운 창조였다. 절대적인 규칙과 규정은 없다. 이젠 교복도 생활복도 체육복도 다 좋은 시대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용인되는 와중에 파격과 창조의 기회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오히려 막막하다. 일부 학교에선 사복도 묵인하는 분위기이다. 선생님을 만나고 인사를 안 해도 그만이고 제가 더럽힌 자리를 치우지 않아도 그만이다. 가르쳐 왔던 것들이 변해버린 시대에, 가르칠 게 있기나 한 거냐는 무력감이 엄습하는 이때, 그래도 가르치는 게 일인 사람으로서 그 가르침을 새롭게 찾아야 하는 어려움은 오늘도 끊임없는 고뇌와 도전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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