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아주 잘 하는데 너무 성적에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학생 얘기를 들었다. 사실 그런 애는 한둘이 아니다. 갑자기 입원한 후배 국어샘 수업, 두 시간씩 보강 들어갔을 때 어떤 아인지 찾아봤다. 태도가 좋았다. 집중하여 듣고 수업 마치고 질문이나 소감을 말하라 하니 발표도 했다. 괜찮군, 점수만 밝히는 공부벌레는 아니네 싶었다.
기말시험을 치르고 나서 학부모가 찾아왔다. 성적에 대한 민원이 있단다. 담당교사를 찾기 전에 교장을 만나려는 까닭은 뭘까. 학부모는 채점에 대한 불만을 말했다. 샘들은 생각도 못할 지나친 억측도 했다. 오류가 있다면 정정할 수 있으니, 담당선생님을 만나서 대화해 보고 문제나 채점에 납득이 안 되면 정식으로 이의신청서를 내라고 했다. 그런데 대화 중에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아이는 특정대학 특정과에 넣을 수 있는 성적을 받고 있고 그걸 유지해야 하는데 이번 과목의 점수 때문에 그것이 위태롭다는 식의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인생이지는 않은가. 최선을 다하여 이루면 좋지만 틀을 먼저 정해놓고 그 안에 집어넣으려 안달을 하면, 특히 부모가 그러면 아이가 매우 위험해지는 경우를 봤기 때문에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학부모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학생을 만나보리라 생각했다. 담당교과선생님을 만나고 다음날까진 별말이 없어서 조용히 넘어가나보다 싶었을 때, 그 학생을 교장실로 보내달라고 메시지를 넣었었다. 좀 있다 학년부장 전화가 왔는데 그 학생이 다시 이의신청을 몇 개나 했단다. 그래도 만나보실는지? 음, 그것과 별개로 만나보죠. 보내주세요, 했다.
금요일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그날은 일곱 시간을 full로 채웠다. 학생과 선생님 면담으로 꽉 찬 하루)
학생이 원탁에 앉자 물었다. 이의신청했다며? - 예.
그래 납득이 안 되는 건 따져봐야지. 선생님들이 잘 협의해서 더 이상 의문이 없는 결론이 나기를 바란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께 전부터 네 얘기를 좀 들었어. 공부를 아주 잘하는데 성적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아이는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예,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런데 어머니를 만나보니, 너무 너를 틀 안에 넣으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서울의대를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부모님 때문에 네가 더 압박감을 느낀 것 아니니?
아뇨. 그건 제가 좀 그래서. 제가 공부를 하면서 자꾸 기준이 높아지니까 부모님도 저를 도와주려고 그렇게 하셔요.
그래? 부모님이 먼저 그렇게 하시는 건 아니고?
예, 제가 먼저 그랬어요. 이번 시험에 대한 이의제기도 제가 자꾸 고민하고 힘들어하니까 도와주시려고..
그래, 담당선생님도 그런 말씀은 하시더라. 어머니가 너를 위해서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대.
그래서 부장샘께 훈계도 좀 들었단다. 고등학생 정도면 시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스스로 하면 되지, 부모님까지 대동하냐고. 그래서 두 번째 이의신청은 아마도 학생이 냈을 거다.
어머니랑 대화가 잘 되나 보지?
예 부모님 모두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셔요. 친구들에게는 못하는 말도 부모님께는 할 수 있어요.
넌 여러 가지로 운이 좋구나. 공부도 잘하고 또 그렇게 너를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부모님도 계시고. 부모님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도 매우 많은데, 복이 많구나.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이의 얼굴이 선하다. 그늘 없이 자란 티가 난다.
네가 공부를 잘하는 건 타고난 머리가 우수해서? 열심히 노력해서?
둘 다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머리를 타고난 건 니가 저절로 얻은 거니까 운이 좋은 거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것도 끈기와 집중력을 타고난 거라. 그것도 운이 좋은 거야.
예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들어봤니?
예
그분이 그러더라. 한국 젊은이들이 공정성을 아주 중시하는데,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댓가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나누거나 내줄 수 없다는 생각. 그게 잘못됐다는 거야. 원래 세상은 그렇게 공정한 게 아니라, 운이 좋거나 나쁠 뿐이라는 거지. 자기의 능력이나 노력이란 것도 대부분은 운이 좋게 타고나서 그렇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 좀 겸손해지지. 그리고, 맞지 않겠니? 큰 부자도 아주 뛰어난 천재도 모두 타고 났잖아.
그런 것 같아요.
그래, 너는 아주 운이 좋아서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도 좋은 분들을 만났는데, 그렇게 좋은 조건의 니가 성적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너보다 못하는 친구들은 어떨까?
아이는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된다.
아니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저렇게 공부를 잘해도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 받는 것 보니 공부 잘하는 거 좋은 것만은 아니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위로받을 수도? ㅎㅎ
아이와 나는 함께 웃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운이 안 좋게 난 사람과 그 운을 나누고 함께 행복해지는 일을 해면 좋겠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나라의 훌륭한 인재가 되어야지. 의대는 언제부터 가고 싶었니?
중학교 때부터요.
다들 공부 잘하면 의대 의대 하니까 자연스레 의대 쪽으로 관심이 갔겠지. 좋은 의사가 되는 건 좋은 일이야. ㅡ의사, 의대에 대해서 학생과 나눈 얘기를 다 쓰려면 너무 많다. 의대정원 확대, 2년 전 전공의 파업까지. 전공의들이 낸 성명서인가를 보면 나이 서른 넘은 성인이 되어서도 수능 점수 높은 것으로 자기 가치를 매기는 젊은 의사들, 사실 한심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자랑할 게 언제까지나 수능성적이라니.
학생은 동의의 고갯짓을 했다. 표정이나 태도가 좋았다.
내가 십몇 년 전 큰 병에 걸려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청소하는 할머니가 들어오셨어. 연세가 꽤 많은 분이었는데 난 그 할머니가 부러웠지. 내가 환자가 아니었다면 그 할머니를 조금 딱하게 봤을지도 몰라. 저 연세에도 힘든 일을 하시는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때 생각은 이랬어. 나이 들어도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낮은 사람이 아픈 사람이라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실제로 제일 낮은 위치이기도 하거든. 의사가 되려는 사람은 가장 낮은 처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민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는 걸 먼저 생각하기 전에.
내 담당 의사 선생님이 아주 좋은 분이었어. 명의라는 방송에도 나올 만큼 실력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좋았단다. 항상 웃는 얼굴로 활기차게 들어와서 아픈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분이었지. 너도 의사가 되면 그렇게 하렴.
예. 아이는 감명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공부를 잘하고 무슨 직업을 얻고 돈을 많이 벌고. 그런 목표의식도 좋지만, 마음이 굳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니? 점수 몇 점에 온 마음이 흔들리고 작은 좌절에도 불안하고 절망하고, 그런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스스로도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학생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관리.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 얘기 해 볼까?
애들에게 가끔 들려주는 사춘기 시절 내 마음관리 비법(?)이다, 힘들 땐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주로 내 마음을 옮겨서 나를 인식하면 나란 존재,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문제 같은 건 티끌도 못 된다는 걸 느끼게 되고 그러면서 훌쩍 마음이 가벼워지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수업 시간 재미없으면 공책에 한자로 관조(觀照) 정관(靜觀)이란 말을 쓰고 또 쓴 일.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 현실의 작은 틀 속에 빠져들면 불안에 잡아먹힐 것 같아, 멀찍이 객관화해서 나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던 시절. 너도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해 보렴.
진리를 깨달은 스승들은 나란, 이 몸 안에 갇혀있는 존재가 아니래. 온 우주가 다 나란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 그런데 그 스승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실상이고, 우리는 생각-실상이 아닌 망상에 갇혀서 전도몽상, 뒤집어져 있다고 하지. 이런 얘기 무슨 소리인가 싶을 텐데, 그냥 마음 한 켠에 질문의 씨앗으로 심어두면 좋을 거야. 나는 어릴 때부터 이 삶이라는 것이 너무 이상하고 궁금해서 이 모든 것의 실체가 다 뭔지를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진짜 꿈이었어. 음, 그건 지금도 그렇고
아이는 조그맣게 와, 했다.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존재라는 걸 잊지 마라. 그러면 작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마음에서 놓여나기 쉬울 거야. 꼭 가지고 싶은 어떤 것들, 결국엔 사라지고 말 것들에 내 온 마음을 걸지는 말면 좋겠다. 위대한 스승들이 끊임없이 일깨우는 진리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거든. 열심히 공부해. 집착할 땐 집착해야지. 나도 그때는 그랬지. 목표하는 대학에 못 가면 그다음 인생 계획이 없었어. 입시공부 너무 싫어서 재수를 할 바에야 죽어버려야겠다 싶었고. ㅎ 그런데 거기에 자기 존재가 먹혀서는 안 돼. 지금의 집착은 잠시의 과정이라는 걸 생각해. 의사가 되든 또 다른 무엇이 되든 눈앞의 형상에만 매몰되지 말고, 더 큰 길, 진짜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게. 이의신청도 그런 차원에서 따지고 해결하렴.
학생은 반듯하게 인사하고 나갔다.
오후에 들으니 이의신청 건은 문항 두어 개는 다시 채점하여 그 애는 점수가 소수점 얼마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단다. 그래, 궁금한 것 이상하다 싶은 건 묻고 따져야지. 그런데 더 근원적인 질문도 품고 살아야 한단다. 진짜 나라는 존재, 진리의 답을 찾아야지.
뫼비우스의 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