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김정원 시집을 읽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시집을 어떻게 읽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시집을 훑어보듯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정독을 하고, 그 다음에 마음에 담겼던 시를 찾아내 꼼꼼히 읽어봅니다. 물론 훑어보듯 한 번만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김정원 시집을 전부 읽은 것이 아니어서 그의 시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무르익고 성숙되어 왔는지를 살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와 두 권의 합동시집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페북에 올라오는 그의 글과 시를 눈여겨 보고 꼼꼼히 읽는 편이었습니다.
이번에 그의 시집 <아득한 집>을 읽고 그가 이미 노자의 아나키즘 즉 자족自足, 자화自化, 자치自治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테면 이런 시들 말입니다.
조용한 내외가 사는
산중 절간 같은
우리집
차분히 겨울비가 내리는
섣달 열하루 아침
이 닦고 손 씻고
거실 벽에 베개 대고 앉아
책 읽으니 사뭇 좋다
더구나 착한 아내가
따뜻한 유자차도 갖다 주니
부러울 것도 바랄 것도 없이
말할 수 없는 어떤 감흥이
가슴 속을 축축이 적신다
응달 잔설을 녹이는
푸근한 겨울비처럼
- ‘자족’
(......)
글 한 줄 읽지 않았는데도
다섯 수레의 고전을 읽은 듯 뿌듯했습니다
내 몸에 들어왔던 그리운 사람을 추억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더럽힐까 버스를 타지 않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숫눈처럼 죄가 없었습니다
꾸밈없고 아픈 데 없는 삶이었습니다
잿빛 노을이 하루의 대문에 빗장을 거는 때
순백한 치자꽃 곁에서 말과 나를 잃어버린
나는 무위자연이었습니다
- ‘치자꽃 곁에서’ 일부
그래서 그의 <아득한 집>은 더 이상 욕심부리지도 않고 꿈꾸지 않아도 되는 아늑한 집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대안학교를 퇴직한 뒤에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 마을에 안착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도 이제 편안히 받아들입니다. 물론 시집의 사모곡들이 마음을 절절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아버지는 늘 느릿느릿 걸었다
황소를 앞세우고 쟁기를 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버지한테서는 늘 소똥냄새가 났다
식구들의 밥인 두엄을 날라 논에 뿌렸기 때문이다
눈 쌓인 땅에 아버지가 묻힐 때, 나는 울고 울었다
봄이 오면 아버지가 뚝새풀로 다시 돌아 오리라
그 풀씨가 검정 고무신 안팎에 달라붙어
아버지가 가는 곳마다 늘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 ‘뚝새풀’
저도 그와 비슷하게 학교를 퇴직하고 농촌 마을로 들어왔지만, 그가 도달한 무위자연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종종거리고 두리번거리고 도시 생활의 시간표에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완전한 전환을 이루고 살지 못한 거지요. 저는 아직 이런 수준입니다.
한 시간에 한 대 다니는 버스를 방금 놓치고
자꾸 눈길은 지나가는 택시를 힐끔거리는데
오라는 사람도 없고 급한 일도 없는 내가
이렇게 뜬 풀처럼 마음이 부산해지는 것은
뿌리 없는 삶의 습관성 얄팍함 때문인가
무릎이 아프고 어깨 옆구리가 결리고 쑤시고
성한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골 할머니들이
침 한 대 한 시간 물리치료를 받기 위하여
고깟 버스 한 대쯤이야 하고 깔깔거리며
안되면 하루라도 더 기다릴 것 같은 기세로
푸댓자루를 깔고 앉아 떠드는 것은
산다는 게 마냥 간발의 차로 놓치는 일이고
울고불고한다고 해도 오지 않는 것은 끝끝내
오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알아서일 터인데
버스 한 대를 놓치고 이리 어수선한 마음은
진작 놓을 걸 아직도 잡고 있었다는 뜻인가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던 동구 밖
저녁노을 아래서 서성거리던 눈물 탓인가
-졸시 ’방금 버스를 놓치고‘
아직 선생님의 얼굴을 직접 뵙지는 못한 사이이지만, 내년 배롱나무 한창일 즈음 찾아가 그의 시 “명옥헌‘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그의 최근 시집 <아심찬하게>에서는 어떤 시세계를 보여줄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