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노자, 사(士) 계급 비판과 도(道)에 대한 재정의(1)
춘추전국 시기는 철기의 발견과 그에 따른 무기의 변화, 천(天)에 대한 불신과 회의, 그로부터 일어나는 사회적 계급의 붕괴는 제후국간의 무한 전쟁에 돌입하게 하였다.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서 지식인 계급이 등장한다. 종법질서가 무너지고 제후국간의 전쟁이 지속되면서, 위정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을 끌어 모았다. 이들 지식인은 사회, 문화, 외교, 행정, 군사와 전쟁의 지식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 제후국에서 관리가 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은 혈연에 의한 세습보다는 지식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이 비교적 넓고 다양하게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때 등장한 지식인들이 사(士) 계급이다. 사 계급은 봉건 질서가 붕괴되면서 몰락한 귀족 지식인들이 생존을 위해 민간에서 지식을 보급하게 되었고, 이러한 지식을 습득한 집단이다.
사(士) 계급은 지배계층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하였지만 서주 이래의 제례와 의례를 포함하는 예악, 활쏘기, 말 몰기, 학문 지식과 행정 문서 작성, 수학적인 셈[禮樂射御書數]을 학습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받은 교육은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전쟁의 전술, 외교술 등을 이해하게 하였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사(士) 계급은 엄격한 종법 사회 속에서 조상을 존경하는 “존조(尊祖)”, 종묘를 공경하는 “경종(敬宗)” 의식을 갖추고 일생을 경대부에 의지해서 조금도 참월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사(士)는 관직을 잃지 않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거나 “충성과 순종하는 태도로 윗사람을 모심으로 자기의 녹을 잘 지켜 가문을 지키는 것이 사의 효도이다”라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士) 계급과 관련해 하나 더 지적할 것은 이 시기의 사 계급은 세상에 등용되고자 하는 강렬한 의식이 있었다. 『맹자』에 등장하는 “사(士)가 벼슬하는 것은 농부가 밭을 가는 것과 같다”거나, “사(士)가 지위를 잃는 것은 제후가 나라를 잃는 것과 같다”라는 언설이 이를 증명한다. 사인들은 벼슬하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다.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려면 지금 세상에서 나를 버려두고 누가 한단 말인가”라는 주장이 이를 반영한다. 물론 사인들은 문화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통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이 바로 패자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였다.
또한 당시에 하나의 재주만 있으면 등용이 될 수 있었다. 민간에서 재주가 있거나 현명한 이를 등용하는 천거제도 때문이었다. “오직 재주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오직 현명한 이에게 맡겨라”라든지, “현명한 이에게 지위를, 능력 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어라”는 <묵자>의 주장도 이러한 세태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묵가의 논리가 민중성을 갖는 것은 그들의 신분적 한계에서 그러하지만, 전국시대의 상황에서 이들이 보여준 실천들은 민중성보다는 재주와 현명함을 통한 등용에의 의지가 강했다. 이러한 정황들이 들어맞아 학식이 풍부한 사가 자신의 재주와 지모를 빌려 위정자게 등용되고 정치에 간여하면서 열국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각 방면의 필요한 인재 군을 형성해 갔다.
노자는 당시의 상황에서 사 계급이기를 거부하였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주나라의 도서관 관장으로 있다가 주나라가 혼란한 것을 보고 떠나 함곡관이 이르러 관문지기인 윤희에게 <도덕경>을 써주었고, 이후 흔적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주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봉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천하의 질서를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떠난 것이다.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일까? 노자가 활동했던 춘추 말기는 전쟁이 빈번하였는데, 이때의 전쟁은 경제적 착취, 영토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백성들은 전쟁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거나, 전쟁의 비용을 대느라 감당할 수 없는 조세와 부역에 시달렸다. 징집과 조세, 부역을 피해 백성들은 도적떼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위정자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전쟁에 몰두하고, 사 계급은 권력자에게 빌붙어 출세만을 추구한 것이다. 노자는 당시의 상황을 비분강개하여 서술하고 있다.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정자들이 세금을 많이 먹기 때문이고,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정자들이 일을 벌이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위정자들이 너무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당시의 상황을 전쟁에 끌려가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그나마 지은 농산물도 세금으로 모두 빼앗겨 백성들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위정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자는 이들을 도적의 우두머리라고 한 것이다. “백성들의 논밭은 잡초만 무성하고 창고는 텅 비었는데, 위정자들은 깨끗한 조정에서 비단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물리도록 먹고도 재화가 남아도니, 이들이 도적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노자는 당시의 이러한 혼란은 바로 사(士)를 천거하고 높이던 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사 계급은 권력자들의 부국강병책에 필요한 이론을 만들던 이데올로그였다. 노자는 이들이 전쟁을 부추기거나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를 천거하던 제도와 당시의 사 계급을 비판한다.
“현명한 이를 숭상하지 말라. 그래야 백성들은 잘나 보이기 위해 서로 다투지 않을 것이다. …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하고, 저 지식 있는 자들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지 못하도록 하라. 백성들을 자연스럽게 살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사 계급이 관리가 되는 방법은 그가 현명하거나 능력이 있다거나 재주가 있다는 것을 제후나 대부에게 유세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에 서민 중에서도 현명하거나 능력이 있으면 천거하여 관리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니 백성들은 현명한 이와 능력 있는 이를 숭상하며 그들처럼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노자는 이것이 더욱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노자는 심지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들이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뛰어난 재주인 성과 지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백배가 되고, 훌륭한 행실인 인과 의를 버리면 백성들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진다. 위정자들이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들이 없어진다”라거나 학문을 끊어버리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다.
장자는 노자보다 더 강도 높게 당시의 상황을 비판한다. “오늘날 형 집행으로 죽은 사람들이 서로 포개어 누워있고 형틀에 매인 사람이 서로 의지해 있고 형을 주고받아 주살된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쌓여 있는 연후에야 비로소 유가, 묵가가 이러한 질곡의 사이에서 기세부리기 시작했다. 아! 심하도다. 나는 성인의 지혜가 형벌의 도구를 낳게 한 근원이 아닌지 모르겠다. 인의가 질곡의 수갑과 차꼬가 아닌지 모르겠다.” 장자는 성인의 지혜가 형벌을 낳는 근원이고 인의가 손을 묶는 수갑이고 목을 옭아매는 차꼬라고 보았다. 백성들이 죽음에 내몰려 시체가 쌓인 곳을 당시의 사 계급인 유가와 묵가가 유세를 부리며 다닌다고 보았다. 그러니 당시의 사들이 주장하는 인의와 시비와 예라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해치고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묵형이자 코 배는 형벌이었다. 노장은 당시의 종교였던 천, 사 계급이 지향했던 지식, 재주, 성과 지, 인과 의를 부정한다. 이러한 지식이 전쟁을 부추기고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타개하는 방법은 당시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유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노장은 ‘도(道)’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노장 당시에도 도라는 용어는 존재했다. 신앙 대상이었던 천(天)에 대한 개념으로 천도가 있었으며, <논어>에 보이듯이 공자도 도라는 용어 사용하였다. 천도는 천체의 현상이나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의지를 의미했다. 공자가 말한 도는 충서(忠恕)와 같은 당위를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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