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독서 출판 칼럼, 조정래 장편소설 『황금종이』

돈이라는 것의 위력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11.21 08:51 의견 0

“세계 최고의 역사학자이면서 소설가로도 꼽히는 중국의 사마천은 벌써 2,20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백금으로는 형벌을 면하고, 천금으로는 죽음을 면하고, 만금으로는 세상을 얻는다. 바로 그 세상을 얻는다는 말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재벌들이 국가권력까지 쥐고 흔들어대는 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정래 장편소설 『황금종이』(해냄)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정래 작가는 이를 “평범한 사람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10배가 많으면 비난하고, 100배가 많으면 두려움을 느끼고, 1000배가 많으면 그의 심부름을 하고, 1만배가 많으면 그의 노예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돈이란 무엇일까? 돈은 “인간의 실존인 동시에 부조리”인 걸까? “인간은 영원한 돈의 노예”인 걸까? 『황금종이』에는 돈의 의미를 묻는 어록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인간 사회를 지배해 온 두 개의 권력은 정치와 종교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지배하는 권력이 있다. 그것이 돈이다.” “자본주의는 돈의 위력과 만능성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어 올린 주의다. 그것은 곧 인간 스스로 돈의 노예화를 선언한 것이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다 죽었고, 생살여탈권을 가진 돈만이 오로지 살아 있는 신이다.” “돈이 있은 이후에 인간 사회는 줄기차게 돈에 지배되어 있다.”

『황금종이』는 돈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돈은 부모와 자식, 형제의 사이도 한순간에 갈라놓는다. 이 소설은 돈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비극의 향연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작가는 황금만능주의로 비인간화되어 가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 소설을 4년 동안 썼다고 밝혔다. 소설에는 어머니와 소송을 벌이는 딸,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금고를 열어 재산을 나누려는 자식들, 건물을 인수하자마다 임대료를 4배나 올리는 건물주, 아버지가 죽자마자 이복형에게 재산분할을 요구하는 남자, 죽는 순간까지 아들에게 통장을 내놓지 않는 어머니, 청소년에게 술·담배를 대신 사주며 겨우 연명하는 노인 등 일간지 사회면에서나 볼 수 있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숏폼의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플롯이 복잡하면 독자의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소설은 플롯이 단순해서 한두 줄의 문장으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소설이어야 한다. 나는 임팩트가 강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소설이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캐릭터가 강한 인물이 독립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옵니버스 방식의 작품은 세계 시민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로는 작년 가을에 출간되어 독자의 관심을 압도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를 예로 들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출신인 82세의 아버지가 전봇대에 부딪쳐 죽고 난뒤 치러지는 3일간의 장례식에 조문객들이 찾아오는 단순한 구성이다. 조문객들과 아버지와의 인연을 풀어놓은 이야기는 심장 떨리는 이야기들이다. 『황금종이』는 ‘운동권 처녀성’을 유지한 인권변호사 이태하와 이태하의 대학 선배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귀농해 농사를짓는 한지섭 등이 중심이 되어 돈이 인간의 실존이자 부조리임을 통감하게 만드는 인간군상들을 보여주어 우리의 가슴을 뒤흔든다. 『황금종이』를 읽으면서 나는 작고한 아버지 시신의 피가 식기도 전에 재산다툼을 벌이던 형제들 때문에 자식들을 위해 한푼의 재산도 남기지 않고 다 써버리고 죽겠다는 작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조정래 작가는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라고 말했다. 아니다. 독자는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읽어대고 있다. 독자가 정보를 소비하는 습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은 챗GPT라는 비서마저 거느리고 있다. 이런 독자의 습관을 맞추지 못한 책은 바로 도태된다. 책은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되어야만 한다. 세계의 주요 출판사들은 출판 비즈니스의 패턴을 바꿔서 역사상 최대의 이익을 해마다 갱신하고 있다. 그러니 출판과 책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나는 어제 올해 출판시장을 정리하면서 미래를 대응방식을 제시하는 짧은 글 하나를 써서 송고했다. 이 글은 <기획회의> 597호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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