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응우의 자연미술 이야기, 자연미술의 ‘중간지대론’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11.21 07:16 의견 2

잠자는 만월, 금강, 한국, 2016
수면과 접한 강변의 돌을 활용하여 커다란 보름달의 형상을 드로잉하였다. 수면에 비친 달은 일출과 함께 사라졌으나 마음속의 달은 강바닥에 누워 쉬고 있다.

인식과 깨달음의 “중간지대”

나는 1981년 8월 ‘야투’의 창립전을 통해 현장미술연구회의 일원이 되어 40년 넘게 자연미술연구가로 현장의 작업을 연구해왔다. 우리는 처음 20명으로 시작했으나 유학, 생활 터전으로 귀환 등 해가 갈수록 인원이 줄어 언제나 10명 내외의 약관의 청년회원들이 사계절 연구에 참여해왔다. 창립부터 현재까지 43년 동안 회원으로서 공백없이 줄곧 함께한 작가는 다섯을 넘지 않는다. 언제나 회원 배가를 위한 노력을 했으나 오히려 줄어든 것은 아마도 자연미술이 자본주의 이념 또는 우리의 실생활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긴 세월 야투의 사계절 연구에 동참했던 예술인들은 국내에만 수백 명에 이른다. 즉 흥미롭고 재미는 있으나 먹고 사는 생활에 도움이 안 되어 오랫동안 지속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만 아니었다면 자연미술운동은 더 빨리, 더 넓게 확장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울러 자연미술의 이론적 체계나 미학적 가치 규명 등의 일반화도 더 조기에 확립되었을 것이다.

나는 자연미술의 ‘중간지대’에 대하여 김치나 된장의 ‘숙성기간’과 비교한 바 있다. 작가와 자연이 자연물 오브제를 통해 작업을 수행하지만, 작가의 일방적 진행이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 또는 자연이 준 메시지를 근거로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 속 작업은 작가가 어찌할 수 없는 다양한 현상들이 존재하며 이 또한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 지점을 자연물과 자연현상을 통해 작가와 자연의 본질이 만나는 것이며 나아가 우주와 만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인 자연의 이법理法 또는 무위이화無爲而化와 깊이 연관되며 다른 미술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미술의 특질이며 핵심으로 본다.

인식(認識/Recognition)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다, 그리고 깨달음(Enlightenment, Realization)은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을 뜻한다. 즉 자연현장에서 다양한 자연물 오브제를 대상으로 인식과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종의 창조적 행위가 자연미술작업인 것이다.

자연미술 = A(자연현장) + B(미술행위) + α(중간지대)


즉 자연미술은 자연현장과 미술행위의 합집합이며 A와 B가 교차된 부분이 α의 작용에 의해 더욱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공간을 자연미술 안에 존재하는 – 인위로 어찌할 수 없는 - ‘중간지대’로 규정하고 예술가는 이 공간을 통해 자연의 질서(理法)를 만나고 저절로 됨, 더 나아가 우주와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절인 배추를 양념에 버무려 항아리에 넣는 것은 우리가 하지만 항아리 안에서 숙성되는 동안 김치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채 자연의 질서를 만나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특유의 맛을 지니게 된다.

이 ‘중간지대(中間地帶)’는 자연미술의 핵심이며 일반적 미술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자연미술가는 자연현장에서 맞이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고 - 분명치 않았던 사물의 본질과 진리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 더 큰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자연 현장은 생명의 현장이므로 시시각각 자연의 제 현상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과 자연의 현상이 만났을 때 그 안에서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깨닫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결국 자연 안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현상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작품 속 에너지로 환유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이제까지 자연미술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였으나 적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 미학적 가치를 부여한 예는 없었다. 1981년 여름 창립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금강유역의 대학생들에 의해 자연현장에서 미술을 연구하다 우연히 진화 발전한 이 경향은 서구의 흐름과 무관하게 시작되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규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으나 현대미술의 주류는 언제나 도시 중심적이며 자본주의의 영향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그 밖의 지역 또는 경향에 주목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지연의 한 이유였다.

서구에서는 일찍이 대지미술이 큰 바람을 일으킨 바 있었으며 이후 환경미술, 설치미술, 현장미술(Site Specific Art), 생태미술, 소멸미술(Ephemeral Art) 등 다양한 유형의 예술행위가 언명된 바 있으나 우리의 자연미술과는 일치되는 개념들은 아니다. 또한 서구에서도 한국의 자연미술에 대해 자신들의 그것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동양적 자연관 또는 신비주의에 기초한 정서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자연미술을 서구의 맥락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철학적 관점에서 살피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나의 ‘중간지대론’은 서구미술에서 발견할 수 없는 동양적 신비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자연미술의 핵심요소로 앞으로 자연미술연구의 중요한 정신적 철학적 근거가 될 것을 기대한다.

파도를 위한 성城, 한국, 1993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나는 바닷가는 늘 분주하다. 태안의 파도리 해변은 크고 작은 돌이 파도에 씼겨 동글동글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큰 바위 위에 작은 돌들을 모아 성을 쌓았다. 밀물이 다가와 만수위에 이를 무렵 나의 작은 성은 파도를 타고 대해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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