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진주지수중학교장
현재 학교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꽃다운 선생님들의 죽음과 그에 항의하는 수많은 검은 점들의 움직임이 매주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2023년의 학교는 대단히 혼란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수요일(2023년 10월 25일) 경남교육청 산하 미래교육원에서 제2 차 경남교육정책 포럼이 있었다.
“학교를 민주주의의 정원으로”라는 주제로 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주제발표와 학교의 3 주체를 대변하는 교장, 교사, 학부모와 교육청의 장학사 등 4분의 패널이 열띤 토론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좌장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를 테면 사회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느꼈던 몇 가지 생각을 옮겨 보고자 한다.
1. 학교는 정말 민주주의의 정원이 될 수 있는가?
그날의 주제인 “학교를 민주주의의 정원으로”와 그날의 포럼은 적어도 내 견해로는 초점이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현재 혼란스러운 상황이 학교 민주주의 실현의 정도와 미세하게 초점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지금 혼란의 바탕에 학교 내 비민주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해법을 학교 민주주의 실현의 정도에 두는 것은 논점의 오류가 생길 수 있는 곤란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학교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만 실현되었더라면 현재의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그러면 학교 민주주의가 아직도 답보 상태인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며칠 동안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A. 학교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것들
i. 자발성의 제한 또는 금지
민주주의의 여러 특징 중에는 구성원들의 ‘자발성’이 중요한 요건으로 거론된다. (민주주의의 조건, 《글로벌 세계 대백과》참조) ‘자발성’이란 문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타인의 요구나 강요에 의하지 않으며, 자신의 내적 동기에 의해 필요한 아이디어를 내려는 성향이다. 그런데 학교 사회는 이 '자발성'의 발휘가 기본적으로 제한되는 공적 기관이다. 즉, '법'과 '규정', 그리고 '지침'이 존재하는 학교 조직 내부에서 '자발성'은 자칫 '불법', 그리고 혼선과 분란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자발성'의 기초 중 하나가 '창의성'이다. 현재 상황에서 학교에서 '창의성'을 가져야 하고 길러야 할 거의 유일한 대상은 '학생'뿐이다. 그런데 그 '학생'의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활동의 담당자인 '교사'는 자발성을 가지는 것에 심각한 제한을 받는다. 매우 역설적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아이들의 '자발성', 즉 '창의성'을 기르기 위한 수업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교육활동을 한다. 그런데 교사 자신들은 공적 조직 내부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수업 외에는 이 '자발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역할의 부조화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내부적 '역할 갈등'이 있다. 특히 교직 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교사들은 이 지점에서 대부분 혼선을 겪지만 정작 그것이 이런 구조에서 생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을 창의적으로 교육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교사의 '창의성'은, 자발성의 근거가 되는데 안타깝게도 공적 기관 내부에서 교사의 '자발성'은 무용하거나 혹은 방해요소가 된다.(수업을 제외한 업무에서) 당연히 학교 조직은 비 자발적 구조가 되기 쉽다.(이 문제는 밑에서 항을 바꾸어 좀 더 깊이 이야기하려 한다.)
ii. 피라미드식 위계구조
학교 내부의 조직은 여전히 피라미드식 '위계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공문의 결재선이다. 학교가 공적 기관이며 위계 서열이 분명한 조직이라는 것을 결재선에 그대로 나타난다. “기안-협조-검토-결재” 속에 담긴 위계와 서열의 정신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교사들 상호 간은 수평구조라고 강조하고 동시에 그렇게 위로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결재선 정점과 말단을 모두 경험하면서 이 구조야 말로 학교 민주주의를 막는 가장 나쁜 구조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학교는 공적 기관이다. 이 결재선을 유지해야 하는 곳이며 그렇게 책임구조를 정해 놓아야만 임무 수행이 가능한 곳이다. 인정한다. 그러면 “학교 민주주의~” 이런 단어는 쓰기 곤란하다. 일부는 민주적이고 일부는 비민주적인 구조가 존재하는 변종(하이브리드)의 기관이 학교란 말인가? 어느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인데 내가 경험해 온 바에 의하면 학교는 여전히 비 민주적 공적 기관의 역할에 더 방점을 둔다.
학교는 해방 이후 변한 것이 거의 없다. 구조적 강직성이 시간에 따라 유연해진(차이는 미미하지만)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89년 전교조의 탄생과 그 후 많은 노조의 탄생이 있었지만 학교는 아직도 민주적이지 못하다. 아직도 '위계서열'에 따라 교내 권력이 질서 정연하게 분배된다. 좀 다른 부분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창의성'에 기초한 자발적인 교육활동은 사실상 제한받기 일쑤다. 이름도 거창한 국가교육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유수한 대학 입시에 실패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심지어 특정대학에서는 특별히 요구하는 교육과정도 있다.) 누구도 쉽게 교육과정을 개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학교에게 위임된 범위 내에서 과감하게 교육과정을 열고 창의성에 기초한 자발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할 교장도 교사도 없다. 2023년 대한민국 학교를 뒤흔드는 무서운 학부모 민원과 지역 교육청의 은근한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