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진주 지수중학교장

교장이 된 교사들이 다시 교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퇴직을 해 버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다시 교사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앞 선 글에서 4개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했다. 지극히 나의 기준이므로 분명 오류가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비판을 감수하겠다고 말했지만 실제 비판에 직면했을 때를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도 있다.

교장에서 교사로 돌아온 선생님이 경남에 몇 분 계신다. 그분들의 술회도 아마 나와 비슷할 것이다. 교장 4년은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었고 경험이었다. 학교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면서 현실의 장벽 앞에서 절망하기도 하였다. 학교에 교사로 있는 것과 교장으로 있는 것의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차이는 전망에 대한 무게와 좌표 설정의 책임일 것이다. 만약 교장의 직책을 담당한 사람이 자신이 있는 학교의 전망과 좌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오로지 교장이라는 이름으로만 학교에 존재할 뿐이다..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운동장의 꽃 한 송이, 나무 하나에서부터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도구들, 그리고 선생님들의 공간과 도구까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이 교장이라는 직책의 무게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유형有形의 학교는 물론이고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삶이 진행되는 무형의 미세한 심리적 상황까지 통찰하여야만 하는 위치가 바로 교장이다. 통찰은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지 세세한 모든 것을 알라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이 나라에서 일어난 비극, 이를테면 학교에서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 앞에 그 학교 교장이 보여준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랭한 학교의 입장문은 그 학교 교장이라는 사람에게 이 통찰이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승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그들이 조금만 마음을 돌리면 분명히 통찰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문제가 있는 학교의 교장들이 한결같이 제도와 상황으로 자신을 엄폐掩蔽하고 있다. 통찰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통찰의 선결요건이 자기반성이기 때문이다. 자기반성은 표면적으로 단위학교 조직의 정점에서 예우를 받는 교장에게 실로 너무나 어려운 요구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교사로 살아온 30년과 교장으로 살아온 4년의 무게가 결코 평형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의 기억이 늘 강렬한 법이어서 교장 4년의 모든 순간이 현재의 나를 지배하고 있다. 잊을 것을 잊어야 한다는 것, 유지할 것만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늘 그렇지 않다.

요즘 자주 심호흡을 한다. 잊을 것을 잊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상황의 유지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