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절을 회고해 보니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던 적이 많았다. ‘길이 없으니, 가지 마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내가 가면 곧 길이 아니겠는가.‘ 고집을 부리고 갔다가 말도 못할만큼 고생만 하다가 되돌아 나올 때의 그 낭패감을 뭐라고 설명하랴.

길은 도처에 있을 것 같은데, 그 길을 찾지 못해, 무수히 후회하고 후회하는 길 위의 인생, 그것이 바로 역사 속의 사람들의 인생이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자 조선 초기의 명 문장가였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금강산유람을 떠났던 때가 성종 16년인 1485년 4월 보름날이었다.

서울을 출발하여 보제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소요산 자락을 지나 철원과 김화, 창도를 지나, 총석정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었다. 아래의 글은 만경대를 가던 길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만경대로 갈 것을 나융에게 청하자, 나융이 퍽 싫어하면서, ‘비로봉의 정상은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나융과 작별하고 만회암萬灰庵에 도착하여 하인을 시켜 밥을 지어 싸가지고 만경대에 오르고자하였다.

그러나 만회암의 승려 역시 싫어하는 기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길이 없으니, 가서는 안 된다.‘

동행한 운산 역시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가 강행하여 한 산 마루를 넘어 한 골짜기를 내려가고, 또 한 산마루를 올라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내려가는데, 낙엽이 쌓여 무릎이 빠지고 썩은 나무가 겹겹이 쌓여 동쪽인지, 서쪽인지, 분간할 수가 없고, 새 한 마리도 울지 아니하였다. 다만 두어 길 되는 폭포소리가 나무 숲 너머에서 들릴 뿐이었다. 운산이 바윗돌을 타고 올라가서 보더니 폭포 위에 또 폭포가 있고, 그 위에 또 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운산이 내려와서 ‘그 폭포를 보니 몸이 오싹하여 간신이 내려왔습니다.’ 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길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나무 아래만 보면서 지레 짐작하고 무인지경無人之境을 찾아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만회암으로 되돌아갔다.“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의 일부분이다.

나 역시 ‘가지마라‘는 안내판을 무시하거나, ’입산금지입山禁止‘나 ’출입금지出入禁止‘를 일부러 거꾸로 읽고서 들어갔다가 모진 고생을 하고 다시 돌아 나온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자위하는 말로, ’길은 잃을수록 좋다. 그래야 새로운 길을 찾지‘라고 말은 하지만, 그 말속에 한약 같이 노고勞苦가 스며있다는 것을 어찌 다른 사람이 알랴,

그때는 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애처로운지,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헤매다 길을 잃을 지언 정, 가지 말라는 길을 가서 아무도 본 일이 없는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남아있는 것은 내가 너무 무모한 삶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내 몸은 가끔씩 고달프다.

“여행자여 길은 없나니 길은 걸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말과 ”헤매다가 길을 잃는 것이 한 번도 헤매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는 말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것을 어찌하랴.(2023년 9월 30일,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