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3. 연기적 사유에는 불변의 실체나 본성이 없다 - 최두석 「현등사 -곤줄박이」

현등사 -곤줄박이

- 최두석

운악산 현등사 보광전

기둥에 걸어놓은 목탁에

새가 깃들여 산다

목탁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곤줄박이의 비상이

경쾌하고 날렵하다

곤줄박이는 알 품고

새끼 기를 집이 맘에 들어

기꺼이 노래하고

새의 노래 듣는 스님은

목탁에 손때 먹인 세월

옷깃 여미고 되새긴다

목탁이 곤줄박이 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법기(法器)로서의 목탁입니까 곤줄박이 새집입니까? 불변적 실체로서의 본성을 생각하는 분이라면 어쨌든 목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탁의 지금 상태가 어떻든 간에 목탁으로 만들어졌고 목탁에는 목탁일 수밖에 없는 불변적 본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연기한 것으로 보는 사람은 그것은 지금 곤줄박이 집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외형적으로는 목탁과 같지만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경험적 인식 요소들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떻게 나무로 저렇게 만들었을까 싶게 둥글고 속이 비어 독특한 맑은소리를 내며, 스님이 드리는 예불에 일정한 리듬을 만들며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큰스님 것일수록 손때가 먹어 색깔도 짙으며 그 세월만큼 끊임없이 텅 빈 마음을 만들어내는 능력 같은 것이 깃든 것으로 느껴지는 등의 요소는 없고 외형만 목탁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연기적 조건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연기적 조건이 스님에서 곤줄박이로 바뀌자 실제로 맑은소리를 울리던 공간은 곤줄박이가 머물고 새끼를 기를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고, 목탁 재질은 뽀송뽀송 잘 마른 나무집이 됩니다. 그런 것이 비도 들이치지 않는 곳에 드나들기 좋은 높이에 걸려 있으니 금상첨화입니다. 거기에서 지금 곤줄박이가 기꺼이 노래까지 즐거이 부릅니다. 그것은 지금의 연기적 조건에 의해 곤줄박이 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적 조건에 따라 생기고 변하며 소멸하는 세계에서는 변치 않는 실체적 본성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목탁일 수 있고 또 조건에 따라 곤줄박이 집이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것을 동일한 그것이게 하는 실체나 본성이나 자성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를 이진경님은 바이올린을 예로 들어 아래와 같은 말을 합니다. 바이올린 자리에 목탁을 넣어 읽어도 실체적 본성을 부정하는 까닭이 잘 드러납니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그것은 악기가 된다.’ 특정한 조건에서만 본성이 되는 것도 본성일까? 앞서 ‘형이상학적 사유’라고 명명했던, 불변의 본질을 찾는 입장에서 본성이란 어떤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좋은 연주자라는 조건과 만나지 못하는 한 실현되지 못하는 본성이란 이미 그 정의상 본성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올린에게는 불변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연기적 사유가 자성 없음을 설하는 ‘공(空)’이란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 20쪽-21쪽)

이렇게 연기법이라는 생생하고 아름다운 진리를 보고 계시니 “새의 노래 듣는 스님은/ 목탁에 손때 먹인 세월/ 옷깃 여미고 되새긴다”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