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걸의 편지/교감으로서의 다짐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9.16 07:22 의견 0

교감이 되면서 꼭 몸과 행동으로 실천하자고 다짐했던 것 다섯가지가 있다.

첫째는 선생님들이 수업준비와 생활지도에 충실할 수 있게 업무과제카드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럴러면 교감부터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학교의 규모마다 업무분장이 달라지긴 했지만 학폭, 생활, 보건, 돌봄, 학부모회, 공간혁신사업, 취학 유예 관련 학적, 혁신지구사업, 학생자치, 그린스마트, 이음교실, 방과후학교 등 안 해 본 업무가 없고 각종 채용과 계약관련업무를 한 번도 빠짐없이 도맡아 했다. 심지어 연구부장이 해야하는 각종 계획서와 보고서까지 수도 없이 내가 대신 작성해서 보냈다.

둘째는 선생님들의 자연생태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텃밭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텃밭을 원하는 학반은 아이들과 식물을 심고 키우고 재배하는 일만 할 수 있도록 한 해도 빠짐없이 텃밭의 모든 준비와 셋팅을 다 해 주었다.

셋째는 아침마다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면서 전교생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었다. 출장이 있거나 하면 빠지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실천해 오면서 아이들의 이름과 가정사까지 기록하면서 외웠다.

넷째는 중간놀이시간 30분동안 선생님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강당과 생태운동장 곳곳을 돌며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의 안전을 살피고 있다.

다섯째 점심시간에 교무실무사들이 좀 쉴 수 있게 교무실을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급식을 하고나면 교무실무사들은 산책을 하거나 친한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며 하루중 유일한 휴식시간을 갖는다. 나는 그 시간에 교무실로 홀로 와서 학교로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도맡아 처리했다.

내가 오늘 주목하는 것은 다섯번째이다.

밀주초에 근무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단 한 통의 전화도 걸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학교에서는 '오늘은 아이가 몇 시에 마치냐?' '학원가지 말고 집으로 바로 가라고 해라' 등의 사소한 개인민원부터 '운동장에 풀 좀 뽑아라' '텃밭에 모기가 너무 많다' '교문앞이 너무 혼잡하다' 등의 학교시설 민원까지 온갖 전화들이 다 걸려와서 점심시간에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이 괴로웠다. 그런데 밀주초의 점심시간 전화기는 고요함 그 자체다. 이 모든 것이 교실을 든든히 지켜주고 계신 밀주초 선생님들 덕분이다. 선생님들 또한 학생지도와 관련해서 나에게 학부모에게 탓을 모두 돌리거나 원망하는 선생님들이 거의 없다. 초창기에 진성민원인들이 몇 명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전학을 가버리고 없다.

민원인들은 왜 전학을 가 버렸을까?

그들의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꿋꿋하게 버텼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의 정당한 교육활동이면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라는 밀주초의 가치를 흔들려고 한다면 교육청에 쳐들어가도 국민신문고 할베를 두드려도 기자를 대동하고 와도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보호자가 학생지도와 관련해서 담임선생님과 면담후에도 뜻이 이루어지 않으면 꼭 나에게 찾아온다. 나와의 대화에도 보호자는 결국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정당한 지도라고 판단되면 나는 끝까지 담임선생님의 편을 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호자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어든다. '담임선생님은 교감선생님때문이라고 욕을 하던데 왜 교감선생님은 자꾸 선생님편만 듭니까?' 이 말을 들으면 순간 서운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는다.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오해가 있겠지요? 그렇게 선생님의 마음을 곡해하거나 저와 갈라치기 하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을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이소' 그래도 불만이면 학교가 해 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으니 지원청을 찾아가보라고 오히려 도리어 권한다. 그렇게 해서 지원청으로 보낸 것도 몇 건 있다. 이래저래 두드려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결국에는 어느날 전학을 가버리더라.

2023년에는 개인의 민원창구도 학부모회를 거쳐서 교무실로 오도록 시스템을 바꾸어 놓았기에 보호자 개인의 요구를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다. 담임선생님의 지도나 교장선생님의 학교경영에 불만이 있어도 선뜻 보호자가 나서기 어려운 시스템이다. 2023년의 밀주초가 그렇다. 그래서 교무실의 전화기는 늘 고요하다. 이 모든 것이 늘 학생들 곁을 굳건하게 지켜주고 계신 밀주초의 훌륭하신 선생님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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