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수 시인의 '시 한 편 숨 한 번'/ 이민숙, 「날개」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9.14 06:00 의견 0

연기1. 연기법,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한다

연기(緣起)란 조건(緣)이 합하여(sam) 일어난다(起)는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떤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그 조건에 기대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또 그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지면 조건에 의해 생성되었던 것도 동시에 변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기법의 대표적 문구가 『중아함경』에 나오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입니다.

부처님은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로 인간 생사의 고뇌 문제를 설명할 때도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식이 있으며, …노사가 있다. 무명이 소멸하므로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므로 식이 소멸하며, …노사가 소멸한다’는 연기법으로 합니다.

“이는 물론 생사고락 윤회의 고리를 깨뜨릴 지혜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설파한 연기의 법칙은 그 강력한 설득력 덕분에 우리 삶의 범위를 넘어서 보다 더 넓게 적용되고 받아들여졌다. 연기란 쉽게 말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조건에 의존해서 생겨나고, 지속하고, 소멸한다는 뜻이다.”(홍창성 『불교철학강의』 116쪽-117쪽)

다음 시를 연기법의 풍경을 보겠습니다.

날개

이민숙

땅이 녹아 흐른다

그 땅을 갈아엎는 소, 쟁기질이 한창이다

무논에 쭈뼛쭈뼛 연초록 잡초도 갈아든다

소의 거친 숨결로 녹여낸 시간만큼 질컥거리며 부드러워지는 논흙 사이로 왜가리 떼 날아든다 논바닥에 수많은 날갯짓, 제 몸 다 갈아엎어진 붉은 흙 속 왜가리들의 양식 버글거린다 지렁이 살 쪼아먹던 왜가리 떼, 날개에 땅 수(繡) 놓여졌다 땅 박차고 일제히 날아오른다

나, 저렇듯 몸 갈아엎어

얼어붙은 목숨 녹여 한 끼 먹이 될 때

흰 날개 세상 초입에 들 수 있을까

양어깨가 싸하다

무논 쟁기질하는 풍경입니다. 그 하나하나가 조건에 기대어 생겨남 그 자체입니다. 봄이 왔으므로 땅이 녹습니다. 땅이 녹으니 농사 준비를 하고 땅을 갈아엎습니다. 땅을 갈아엎으면 제일 먼저 오는 것이 왜가리, 백로, 까치 등입니다. 겨울잠에서 먼저 깬 미생물들을 먹이로 하는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좋은 땅에는 땅속 농부라고 불리는 지렁이들이 바글바글합니다. 그러니 그 최상의 식탁에 왜가리가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연기적 관계를 시인은 한마디로 왜가리 “날개에 땅 수(繡) 놓여졌다!”고 합니다. 왜가리 날개에는 왜가리 날개를 있게 한 모든 것, 왜가리가 찍어 먹는 지렁이뿐만 아니라 그로 이어진 인연(因緣) ‘그 모든 것’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인연으로 충족되어 있기에 날개에 땅이 수 놓여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繡)’를 불교적인 말로 바꾼다면 ‘무한한 연기 관계 혹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자수 놓는 법은 모르지만 추측하여 보면, 보이는 면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뒤로는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지렁이였던 것이 다른 조건에서는 왜가리가 되기도 하고 농부의 다리가 되기도 하고 얽히고설켜 하나의 풍경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수많은 지렁이라는 조건에 의해 왜가리가 됩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지렁이가 없다면 왜가리도 먹이가 없어서 찾아들지 않을 것이며, 그런 땅이라면 척박하여 소도 없을 것이고 또 농부도 없을 것입니다. 또 지렁이가 살지 못할 정도의 땅이라면 이미 무용하여 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시를 쓴 시인도 거기에 없었을 것이며 이 시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법의 정형구처럼 되어 있는 『중아함경』의 표현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도 있다.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도 생긴다.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

정말이지 이 풍경 속 무엇 하나를 생각해도 그 존재(붓다는 사물을 표현할 때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법法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법dhamma은 마음에서 연기한 것을 의미합니다)는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도 있는 연기적 관계의 소산입니다. 그렇기에 지렁이가 없어지면 왜가리도 없어지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하듯 그렇게 관계 속의 존재들도 하나둘 지워집니다. 그렇기에 무엇 하나에도 연기적 관계들로 이어져 있는 것이고 결국 온 세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에도 타자(他者)가 수(繡)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 지렁이가 있으므로 그 왜가리가 있다. 그 지렁이가 생기므로 그 왜가리도 생긴다. 그 지렁이가 없으므로 그 왜가리도 없다. 그 지렁이가 멸하므로 그 왜가리도 멸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이처럼 인연에 따른 연기적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수(繡), 이 세상 모두가 연기적 관계라는 수(繡)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이어진 관계 속에서 어찌 스스로 너에게 가는 좋은 인연이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물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의존하여-함께-일어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연기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나, 저렇듯 몸 갈아엎어/ 얼어붙은 목숨 녹여 한 끼 먹이 될 때/ 흰 날개 세상 초입에 들 수 있을까.”라는 바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繡)라고 표현된 연기법을 깨달아 자기 안으로 들어온 연기 관계의 그물과 잘 공진하는 삶을 생각하는 순간, “양어깨가 싸하다”고 합니다. 거대한 각성, 내 몸 하나로 닫혀있던 존재가 우주적 관계를 회복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날개에 땅 수(繡) 놓여졌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굳이 그 의미를 위와 같이 생각하지 않고도 이 구문을 가지고 말장난을 해보면 그냥 뭔가 의미심장합니다. 예를 들어 ‘꿈에 현실이 수 놓여졌다’라든지 ‘너의 말에는 별들이 수 놓여졌다’, ‘저 꽃잎에는 땅의 숨결과 하늘의 웃음이 수 놓여졌다’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뭔가 깊은 연관과 인연이 새겨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지금 내가 그렇습니다. 조건에 의해 생성 소멸하지만 그 과정을 이 세상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내가 내 안에 들어온 모든 것에 의해 존엄해지고 필연적인 존재로 살아납니다. 그래서 지금을 충분히 사는 것이 그 모두를 살아 기쁘게 하는 힘으로 퍼져갑니다. “업에 따라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나와 나의 세계가 변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좋은 나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이중표 『불교란 무엇인가?』 50쪽)

이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조건이 변하면 소멸한다는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은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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