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호 교수의 노자 이야기/노장(老莊)’에서의 아기(赤子) 메타포(metaphor) 6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9.13 06:00 | 최종 수정 2023.09.13 06:47 의견 0

경기대학교 교수

天行(온전한 삶)

불행히도 우리는 아기가 될 수 없다. 매일 술을 떡이 되도록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아기와 대취자大醉者의 메타포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연의 도를 따르라는 것이다.

장생하기를 욕망하지 말고,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말고, 외부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며, 산과 바다에서 은둔할 필요도 없는 일상의 삶 속에서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자연을 따르는 삶 즉, ‘천행天行’이라고 한다. “순수하여 뒤섞이지 않으며 고요하고 한결같아 변함이 없는 것, 담담해서 작위함이 없고, 움직일 때는 자연의 운행을 따르는 것이 천행天行이다. 천행을 실천하는 것이 양신養神의 길”이었다.

‘천행’과 ‘양신’의 길에는 사려나 의도가 없다. 천행 속에서 행하는 행위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결국 자신의 지식과 견해를 일반적 상황과 일들에 개입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것(物化)이다. 아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삶을 살아낼 사람은 성인밖에 없다. 성인은 천행天行하고 물화物化하는 존재이다.

성인聖人은 살아서는 천행天行하고, 죽어서는 물화物化한다. 고요하면 음陰과 덕德을 같이 하고, 움직이면 양陽과 같이 물결친다. 복福도 짓지 않고 화禍도 짓지 않는다. 대상에 느낀 다음에 움직이고, 부득이한 후에야 일을 한다. 주관적 지식과 견해[知與故]를 제거하고, 자연의 이치[天之理]를 따른다. 그러므로 자연의 재해도 없고, 사물의 구속도 없으며, 사람의 비난도 없고, 귀신의 징벌도 없다. 사려하지 않고, 미리 도모하지 않는다. 빛나지만 요란하지 않고, 믿음 있지만 기필期必하지 않는다. 잠잘 때 꿈꾸지 않고, 깨어 있을 때 근심하지 않는다. 그 삶은 부초 같고, 그 죽음은 휴식 같다.

편안하고 고요하며 텅 비고, 함이 없는 것이 천지의 본래 모습이고, 도의 자기 전개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덕이 온전할 것이다. 덕을 두터이 품은 아이처럼 생명을 잘 지킬 것이다. 생명을 잘 지키는 것은 정신을 외부로 발산하지 않아 정신이 온전할 것이다. 정신이 온전한 자는 성인의 도를 행하는 자일 것이다. 성인도 결국 아이와 같은 도와 덕을 품었다. 그에게는 맹수나 전쟁의 우환이 깃들지 않은 것이며, 삿된 기가 침습하여 병들게 하지 않을 것이다.

염담恬惔·적막寂漠·허무虛无·무위无爲는 천지의 근본이고 도덕의 실질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쉰다. 쉬면 평이平易하고, 평이하면 恬惔하다. 평이염담하면 우환이 들어오지 않고 사기邪氣가 침습하지 않아, 그 덕德이 온전하고 신神이 손상되지 않는다[其德全而神不虧].

노장에서 성인은 의식이나 감각, 사려를 쉬게 하는 사람이다. 욕심이나 의도를 비우는 사람이다. 심의 작용이랄 수 있는 감정, 욕망, 의도, 생각들이 드러나는 방식은 정신의 활동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중에 어떤 것들은 성심成心을 스승으로 삼아 진행될 것이다. 그러면 지혜나 총명을 드러낼 것이고, 몸을 거기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몸을 힘들게 할 것이고, 정精을 요동치게 할 것이어서 신神은 분산될 것이다. 그러면 순일한 기 혹은 조화로운 기는 흩어질 것이다. 이는 「재유」편에서 ‘포신抱神’으로부터 장생長生에 이를 수 있다는 말과는 반대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신神을 끌어안아[抱神] 고요하면 형形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 반드시 고요하고 맑아서 형形을 힘들게 하지 말고, 정精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장생長生할 수 있다. 눈으로는 보는 것이 없고, 귀로는 듣는 것이 없으며, 심心으로는 아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대의 신神이 형形을 지키게 되니, 형形은 장생長生할 것이다. 그대의 안을 신중히 하고 그대의 밖을 닫아 버려야 하니, 지知의 작용이 많으면 어긋난다.

결국 <장자>에서 장생長生은 천지의 근본을 따르는 즉, 천행을 하는 일이다. <장자>의 장생은 도교에서 800년을 산다던지, 1000년을 산다라던지라는 말들에서 보이는, 장생은 결국 불사의 의미를 함의한다는 식의 “장생불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장자>에서의 장생은 불사를 담보하려하지도 않는다. 포신抱神을 하면 장생한다는 것은 온전한 삶(全生)을 의미할 것이다. 온전한 삶(全生)의 의미는 편안하게 타고난 수명을 사는 것, 즉 장수한 삶일 것이다.

허정염담적막무위虛靜恬淡寂漠无爲는 천지의 근본이고 도덕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제왕帝王과 성인聖人은 쉰다. 쉬면 비고, 비면 차며, 차면 갖추어진다. 비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움직이며, 움직이면 얻는다. 고요하면 무위無爲하고, 무위하면 실무자들이 알아서 한다. 무위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우환이 머물 수가 없어 장수한다[年壽長矣].

<장자>에서 장생은 양형에 매인 것이 아니라, 양신에 따른 것이다. 양신養神의 길은 도를 체득하는 길이며, 도를 체득하면 덕이 온전하고, 덕이 온전하면 몸이 온전하고, 몸이 온전하면 정신이 온전해(執道者德全, 德全者形全, 形全者神全. 神全者, 聖人之道也), 장수한다는 의미이다.

저작권자 ⓒ 중앙교육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