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어느 날 한 학생이 찾아왔다. ‘선생님, 다른 학교에는 하나씩 있는 밴드부가 우리 학교에는 그동안 없었어요. 선생님이 대학 때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만일 지도교사가 되어 주신다면 저희가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시작하려면 장비도 꽤 비싸고 준비할 게 많은데 가능하겠니?’ ‘일단 저희가 가지고 있는 악기랑 앰프들하고 기본적인 장비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발 허락해 주시면 너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일단 밴드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대한 일이었기에 지도교사가 되어 줄 선생님만 있다면 꼭 이루고 싶은 모습이었다. 난 반신반의하면서 승낙했다. 첫 활동일에 어찌어찌 교실에서 악기들을 가지고 연주를 해 보았다. 물론 소음 때문에 앰프 등은 사용하지 못했다. 궁색하지만 아이들은 밴드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들떠 했고 즐거워했다.

밴드부의 리더를 맡은 학생과 절친한 친구가 마침 미국 유학을 떠난다며 학교 운영위원인 어머니를 졸라 아이들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중고 드럼을 사러 종로 낙원상가에 갔다. 서툰 안목으로 여기저기 두드려 보다 드디어 밴드의 첫 드럼을 구입하곤 내 허름한 차에 싣고 학교로 왔다. 그러나 합주할 밴드부실이 없었다. 며칠을 전전긍긍하다가 체육부장님의 도움을 얻어 구령대 밑 체육 교구 실의 한켠을 합주실로 만들었다.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보며 반지하 체육 교구 실에서 밴드부는 먼지를 머금고 맹연습했다.

밴드부는 축제가 있으면 가요제 반주를 준비했고 피날레 공연을 준비했다. 수학여행에서도 마지막 공연을 했다. 어디를 가던 손수 무거운 악기와 장비들을 짊어지고 다녔다. 그래도 표정은 늘 행복해 보였다. 한번은 반지하 연습실에 비가 들이쳐 하교도 못 하고 물을 퍼내기도 했다. 운동장 건너 아파트의 민원으로 찜통인 학교 뒤 컨테이너 박스에서 연습하기도 했다. 불평은 없었다. 학교 강당에서 정기 공연을 하면서 너무나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도 흐뭇한 추억이다. 그때 교사의 몫은 그저 함께해 주고, 격려와 응원을 해준 정도였다.

이번에는 34년 전 어느 고등학교 학생의 얘기다. 그 학교 강당 지하실에 있는 문예부 써클 룸에는 학교 축제 행사로 시화전 전시 공간이 정성스럽게 꾸며지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오셔서 격려해 주셨고 축제 때는 시 낭송회를 별도의 소극장에서 열었다. 시화전에서는 정성스럽게 꾸민 공간에 자신의 창작시를 전시하고 구경하러 온 인근 학교 학생들에게 밤늦게까지 설명하는 활동을 했다.

학생은 하굣길에 매일 써클룸에 들러 습작한 시를 토론했다. 공부에 바쁜 3학년 선배라도 들어오는 날에는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붙잡혀 비평 아닌 훈계를 들었다. 집에 가서 밀린 ‘수학의 정석’을 풀어야 하는데, 후회한 날들이 많았다. 그래도 써클을 맡아주신 국어 선생님이 가끔 격려차 내려오셔서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주신 만 원짜리 지폐로 인근 여학교 앞 분식집에서 1, 2학년 십여 명이 배 터지게 떡볶이며 간식을 먹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 학생은 대학에 가서도 학교 그룹사운드 써클에 가입한다. 직접 트럭으로 악기를 나르며 야외 공연장을 설치하고 방학 때는 합숙 훈련을 하며 정기 공연을 준비한다. 전공이 무색한 활동을 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아갔다.

첫 얘기의 밴드부는 내가 처음으로 지도한 동아리(99년 당시에는 써클로도 불렸던)이다. 그다음 얘기의 문예부는 내 고등학교 시절 써클(일명 Club Activity, C·A) 활동이다. 오래전 얘기를 꺼낸 이유는 저 속에서 활동하던 멋지고 의젓한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무척 아쉽겠지만 당시 고생했던 아이들의 활동은 학교생활기록부에 몇 자 적히지 않았다. 대입에 반영이 안 되었고 그래도 되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과연 밴드부 교사인 나와 문예부 교사인 우리 국어 선생님에게도 그리고 당시의 아이들에게도 그토록 열심히 써클(동아리) 활동을 하도록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십수 년이 지나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되는 창체활동으로서의 동아리 활동은 학생부 종합전형 등의 대입에 너무도 중요한 평가 요소다. 학생의 진로에 관한 관심 정도, 그리고 자기 주도성과 도전의식 및 리더십 등을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이라 날로 그 중요성이 크다.

그러다 보니 동아리 활동은 어느덧 다양한 취미, 문화, 예술 등의 분야가 약해지고 학술과 진로 분야가 점령하고 있다. 게다가 활동 자체보다 그게 어떻게 기록되느냐가 중요해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많이 받는다. 훗날 대입에 쓰일 보상으로서의 활동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인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자발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래서 학생 주도적이며 주체적인, 또한 바라보고 있으면 든든하고 어른스럽기까지 한 고등학생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상하게 좋은 취지로 만든 제도들이 반대의 효과를 내는 경우가 있다. 내 경험에는 동아리 활동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 옛날 써클 활동이 그립다.

학생자치회 활동도 그렇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만들어지던 1989년,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흐릿한 기억으로도 당시 우리 학교에서 열 세분의 선생님이 해직당하셨다. 선생님을 지켜야 한다고 2, 3학년 형들이 쉬는 시간에 운동장으로 모여들었고 어느샌가 닭장차로 불렸던 경찰 버스도 교내에 들어왔다. 막내였던 나와 친구들은 어리둥절한 채 복도 창문으로 그 장면을 보았다. 그 집회를 주도한 건 내 동아리 선배들이었다. 그리고 경찰들 사이로 3학년 학생회장의 연행을 막기 위해 구호를 외치던 형들이 기억난다. 당시에 일명 ‘의식화 교육’을 받았다던 문제아들이었다. 한참 학력고사 준비에 열을 올릴 시간이었던 형들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100일주(당시에는 시험 앞둔 100일 전 고등학생들이 술을 마시던 풍습이 있었다)를 마시던 써클 모임에서 공부와 투쟁에 지쳐있던 형들의 취한 모습이 무척 슬퍼 보였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님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을까. 막내인 내 입장으로는 그저 안타깝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훗날 그 형들 중 다수는 그러고도 명문대에 진학했다. 아마도 80년대 학생운동의 끝자락을 겪었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렇고 당시의 선배들도 그렇고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어른 대접을 받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책임질 수 있는 행동을 주체적으로 하려는 시도가 많았다고 본다. 반면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스스로 무언가를 추진하는 아이들의 열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과제나 프로젝트가 떨어져야 그것을 이행하려는 수고들이 딸려 올 뿐이다. 아이들에게 그런 능력을 키워 주려고 교육 제도가 변해왔고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닌데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아이들이 늘어나 있다.

대학 정원 자율화 정책이 시행된 문민정부 이전이었던 그때가 오히려 지금보다 입시 경쟁이 더 치열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당시 학생들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회가 발전하고 고도화되면서 아이들을 너무 섬세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그들을 위축시키는 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돌봄이란 명목으로 간섭을 늘린 건 아닌지 반문해 본다. 아이들에게 현안을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게끔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지도 반성한다. 여유 있는 학급 회의 시간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세태에 때론 한 시간을 넘기며 매주 실시했던 H·R(Home Room)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대학에서도 산악부 같은 전통의 써클들이 취업 준비를 위한 진로와 학술 동아리들로 바뀌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래서 한 동료 교사의 말처럼 중고등학교 동아리는 순수하게 취미와 예체능 분야로 국한하자는 제안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현실화하긴 어렵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본다. 지금의 아이들도 좋아하는 일을 습득하고 표현하는 데는 탁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목표를 이루는 게 우선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교양과 낭만이 반드시 있다는 점을 잃지 않도록 얘기해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경쟁에 낙오되지 않게 목표를 이루고자 애쓰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삶을 이루는 더욱 근본의 가치는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나부터도 잃지 않으려고 다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