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대학교 교수
다시 아기 메타포로
<장자>에서는 양형養形을 위한 삶은 부정된다. 그것은 삶을 어떤 목표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 「각의」편에서는 이러한 삶의 형태를 분류하고 있다. 고고해지려고 마음을 날카롭게 먹거나, 내면적인 수양을 위해 인의仁義를 행하거나,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공명을 세우거나, 한가해지기 위해 강과 바다에 은둔하거나, 장생하기 위해 도인술을 하는 류의 사람들이다. 이들 부류의 삶은 명예를 위한 삶과 몸을 위한 삶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모두 양형을 위한 자(養形之人)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명예를 위한 삶, 역시 육체적인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마음을 날카롭게 먹지 않아도, 인의에 애쓰지 않아도, 공명을 세우지 않아도, 도인법을 익히지 않아도, 고고해지고 수양이 되며, 나라가 다스려지고 장생하는 길이 있을까?
<장자>에서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이다. 그 길은 천지의 도를 따르거나 성인과 같은 덕을 품는 것이다. 천지의 도를 따르는, 성인과 같은 덕을 품는 길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골몰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는 길이다. 달리 말해 정신을 자연의 상태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자연의 상태와 같이하는 것이란, 편안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있으면서 마음을 텅 비게 하고 아무런 작위도 없는 것이다. 작위가 없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며 참된 도덕의 본질이기 때문에, 성인은 이러한 자연의 참 모습에서 쉰다. 정신을 자연의 상태와 같게 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조용하면 담담해진다. 마음이 담담해진 상태에서는 걱정꺼리가 끼어들 수 없고 사악한 기운도 침입할 수 없어, 그 덕은 온전하고 정신 역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5-1. 양신養神과 포신抱神
천지의 도를 따르는 삶을 <장자>에서는 “양신養神”과 “포신抱神”으로 말하고 한다. <장자>에서 말하는 ‘양신’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순수하고 고요하게 하여 한결같이 해내어 어떤 의도를 갖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내는 것, 그러한 상태에서 오직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포신”이란 감각기관을 배제하는 것이다. 듣지도, 보지도 말라는 것은 감각기관을 닫아 고요하게 신을 간직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란 순식간에 우주를 떠돌기도 하고, 사물에 이끌리기도 하여 사방으로 통하고 팔방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정신을 갈무리하여 지켜내는 일, 정신과 육체를 합일시켜내는 일, 그리고 육체와 합일된 정신을 천지자연의 운행에 합치하는 것이, 정신을 기르는 일이자 정신을 지켜내는 일이다.
정신을 기르거나 지켜내는 다른 방법은 어느 곳에 얽매인 마음을 풀어 놓는 것이자, 정신을 자연 상태로 두는 것(解心釋神)이다. 앞서 「각의」편에서 말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의 태도들은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삶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어떤 삶을 이루기 위해 마음은 날카롭게 먹거나, 몸과 마음을 다해 애쓰거나, 지력智力을 써야만 한다. 이러한 노력을 하면서 그 일이 이루어질까 걱정하고, 그 일이 되어가는 상황에 개입해 어떻게 해보려다 마음을 다치거나 몸을 다치게 된다.
결국 <장자>에서는 마음을 쓰는 행위, 즉, 마음으로부터 의도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정신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마음씀과 그로부터 행위 하는 것 즉, 의도와 의도적 행위는 성심成心을 스승으로 삼아(夫隨其成心而師之-「제물론」) 빚어지는 일들이다.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으로 사물과 상황을 의도한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시비是非의 원인이다. 성심에 따른 의도와 의도적 행위는, 도를 가리게 하여 진실과 허위를 산출한다(道惡乎隱而有眞僞-「제물론」).
의도적 마음心 즉, 성심은 부정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성심을 풀어버리는 일은 정신으로 기르거나 지켜내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의도나 의도적 행위를 하지 않으면 일들과 상황은 저절로 변화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해’라고 의식하거나, ‘이 상황은 이렇게 되어야 해’라는 의도를 버리고, “나와 상황을 함께 잊어버려 참된 실재와 하나가 되게, 마음을 놓고, 정신을 풀어버려 혼마저 없는 듯이 하면, 상황은 저절로 바른 것으로 귀결될 터이다. 그런데도 이래야 되라고 나의 의도를 개입하면,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정신을 지켜 내거나 기르는 다른 방법은 감각적인 것들을 배제하는 것 즉, 정신껴안기(抱神)이기도 하다.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외부적인 것들은 의식적 반응을 일으키고, 의식적 반응에 따라 정신은 소모된다. 따라서 감각기관을 닫는 것은 양신의 주요한 방법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장자>를 통해 익히 아는 ‘심재心齋’나 ‘좌망坐忘’, ‘상아喪我’의 개념들도 모두 양신의 방법들이다. 감각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을 배제하는 심재나, 육체적 욕망과 오관의 감각을 배제하는 좌망은, 우리의 의식과 육체로부터 발생하는 질곡桎梏을 제거하는 방법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과 욕망, 의식이 완전한 제거가 보여주는 상태가 ‘상아’였다. 육체는 마른 나무처럼 되어버렸고, 마음은 불 꺼진 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른 나무와 불 꺼진 재의 메타포가 「제물론」, 「지북유」, 「경상초」, 「서무귀」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도에 따라 정신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결국 신을 기르는 ‘양신’과 신을 지켜내는 ‘포신’의 방법들은 성심을 제거하는 것, 감각기관을 닫는 것, 욕망을 없애는 것이다. 다만 저절로 변화하는 도를 잡고서 그 형세를 따르는 일은 덕을 품는 일이자, 형체를 온전히 하는 일이자 신을 온전히 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천지의 도를 따르거나 성인과 같은 덕을 품는 것(此天地之道, 聖人之德也)일 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