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음’에 대하여
세상이 혼란스럽다. 아니 혼란스러워 보인다. 도대체 원인은 뭘까?
주말 내내 고민해 보았지만 오히려 뒤죽박죽 복잡한 생각뿐이다. ‘혼란昏亂’이라는 말의 이면에는 ‘뒤섞이다’라는 의미가 있다. 어둑어둑한 상황에서 뒤섞이는 모습인데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은 뚜렷하지 않거나 혹은 두텁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반증한다. 두터우면 섞이기 어렵고 설사 조금 섞이더라도 금방 구분해 낼 수 있다. 이런 사실에 기초해 본다면 현재의 상황은 얇고 가는 여러 현상들이 얽혀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얇음’에 대한 이야기가 『도덕경』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도덕경 38장)”
“무릇 예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상황이)정성스러움과 믿음이 얇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어지러운 방향으로 간다. 미리 아는 것은 도의 (화려한)겉모습이니 그것은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예禮’에 대한 『도덕경』의 입장은 매우 냉소적이다. ‘예禮’를 통해 세상을 바로 잡으려 했던 ‘유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예’가 필요한 세상은 오히려 얇은 신뢰관계에서 비롯하는 모래알 같은 세상이라고 ‘노자’는 생각했다. 즉 ‘예禮’라는 것은 개인 상호간에 작용하는 정성스러움(인간관계의 깊이)을 해치니 자연스럽게 믿음과 신뢰가 얇아진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자’는 이러한 ‘예禮’가 중시되고 강화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이미 무질서와 혼란을 향해가는 것이라고도 보았다.
‘예禮’가 구체화되면 ‘율律’이 된다. 즉, 제한과 금지와 요구가 구체화되고 이것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복잡한 인간사를 ‘율律’이 모두 규정할 수 없다. 규정하면 할수록 한 없이 얇아지게 되고 마침내 인간 상호간에 작용하는 정성스러움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미리 안다는 것은 ‘지智’를 말함인데, ‘유가’에서는 이 ‘지智’가 매우 긍정적으로 인식되지만 ‘도가’에서는 무위에 역행하는 모든 행위의 근거로 판단한다. 따라서 ‘노자’는 ‘지智’를 ‘전식前識’으로 표현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전식前識’은 확실한 근거 없이 제멋대로 주관에 따라 억측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식前識’에 대한 해석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비자』韓非子 ‘노자를 해석하다’[해로(解老)]편에서, “사물에 앞서 행위 하고 이치에 앞서 움직이는 것을 ‘전식前識’이라고 한다.(선물행선리동지위전식先物行先理動之謂前識) 또, ‘전식前識’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함부로 추측하는 것이다(무연이망의도야 無緣而忘意度也)”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하게 지금 상황과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경우는 아니리라! 이를테면 ‘사물에 앞서 행위 하고’ 와 ‘아무런 근거가 없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목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노자’의 말대로 어리석음의 시작으로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다.
혼란은 결국 이런 것들이 표면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율律’을 통해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려 하고, 사태(사물)와 상황을 고려하여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 근거 없이 함부로 추측하여 자신을 앞세워 움직이는 것이 지금 세상 혼란의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