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적자赤子와 대취자大醉者
<노자> 50장은 그 내용이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고난 수명을 온전히 누리고 죽는 경우(生之徒)도 있고, 제명에 죽지 못하는 경우(死之徒)도 있으며, 살려고 바둥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人之生, 動之死地)도 있다. 이 세 가지 경우에 대해 <노자>는 “십유삼十有三” 즉, 30%씩이라는 통계치를 들이댄다.
물론 셈이 빠른 사람들은 “십유일十有一”을 따져볼 것이다. 이 “십유일十有一”을 어떻게 볼 것인지 심각하게 논란이 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왕필의 주석에 따라, 중국적 사유에서 큰 수를 들어 전체를 표현하는 습관에 따라, 세 가지 경우로 든 십유삼十有三 즉, 90%로써 전체(100%)를 포괄한다고 보아 왔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소자유, 초횡, 왕부지와 같은 학자는 이 10%에 주목했었다. 필자도 이 10%에 주목하고 논의를 하려 한다. 왜냐하면 ‘섭생을 잘하는 사람(善攝生者)’으로 거론된 경우는 ‘죽을 곳이 없는 사람(以其無死地也)’이라고 결론을 맺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결해야 할 선결문제가 있다. 그것은 ‘섭생’을 통해 ‘장생’ 혹은 ‘불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섭생이란 양생養生을 의미하고, 양생은 타고난 수명을 온전히 유지하거나 신체를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섭생의 방법으로는 양형養形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수법이 있다. 그것들은 약물을 먹거나 좋은 음식을 먹거나, 호흡을 하거나, 도인술을 행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법들을 시행하더라도, 불사不死를 담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노자> 50장의 결론 부분에서는 ‘섭생을 잘하는 사람(善攝生者)은 맹수의 공격을 받지 않으며, 전쟁에서도 삶을 유지한다. 뿐만 아니라 죽을 곳도 없다(無死地)’고 한다. ‘죽을 곳이 없다’는 것은 영원한 삶(eternal life)을 산다는 의미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불사(immortality)를 함의한다. 그렇다면, <노자> 50장에서 말하는 ‘섭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육체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양생술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을 곳이 없다”라는 문장에 대해 소자유는, 살지도 죽지도 않는 무리로 보고, 초횡은 지켜낼 삶이 따로 없는 자라고 본다. 이들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을 성인으로 본다. 성인은 삶을 삶으로 보지 않고,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아, 삶과 죽음을 즐기는 존재로 본다. 소자유와 초횡의 말은 삶과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 10%에 속한다는 말이다. ‘죽을 곳이 없다’라는 말은 말그대로 불사不死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왕필王弼은 이들 죽을 곳이 없는 10%의 사람들을 ‘외부 사물 때문에 그 근본을 버리지 않으며, 욕심 때문에 그 참됨을 더럽히지 않는 것’으로 주석한다. 또한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아기’를 거론한다.
아기는 외부 사물에 무심無心 혹은 무신경無神經하다. 특히 갓난아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의식이 있을까, 영혼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갓난아기의 이러한 상태에 대한 <노자>적인 표현은 “혼백이 하나를 안아 떠나지 않으며, 기를 전일하게 하면서도 부드럽게 하는” 즉, “두텁게 덕을 품는 것”이었다. 실지로 아기는 복이, 호흡, 도인술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섭생을 잘하는 자의 메타포로 사용되었다면, 양형을 위한 섭생은 아닐 것이다.
아기와 비슷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내용을 <장자>에서 찾으면, 「달생」편의 만취해 술에 떡이 된 사람이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광고 카피처럼, 만취해 떡이 된 사람은 달리는 수레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뼈를 갖거나 살을 가진 것도 아니고, 다리가 하나 많거나 팔이 세 개인 즉, 다른 신체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수레를 탔는지, 수레에서 떨어졌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그래서 그는 달리는 수레에서 떨어져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떡이 되어 본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내가 술인지 떡인지 의식하지 못한다. 즉, 의식의 활동이 정지되어 있다. 이러한 사람을 두고, 「달생」편에서는 ‘신이 온전한 상태(神全)’의 사람이라고 한다.
술에 만취한 사람에 대한 서술은 무시무청无視无聽의 상태, 무노여형无勞汝形, 무요여정无搖汝精의 상태이다. 이는 갓난아기의 상태와 동일하게 읽힌다. 술에 만취한 사람과 아기는 감각에 얽매이지 않고, 정신과 심리적 활동으로 인해 피로하지 않으며 요동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는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아 한결같은 상태(載營魄抱一, 能無離乎)이거나, 신神을 껴안아 고요한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는 덕을 두텁게 품은 상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