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장자』 천지天地는 전체적으로 유가儒家의 영향이 강하다. 천天이라는 개념을 내 세운 것만 보아도 ‘장자’적 세계관과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초월’적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天(하늘)만한 것이 없기는 하다. 천지에서는 ‘내편’, ‘외편’의 ‘인간세’나 ‘산목’ ‘외물’ 등에 나오는 내용을 부연 설명하는 부분이 많다.
그 중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먼저 무無의 세계를 가정한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덕德이라 했다. 그 다음으로 명命이 생겨나고 여러 가지 상황이 이理에 따라 나타나니 그것을 형形이라 불렀다. 형形으로부터 성性이라는 법칙이 생겨났는데 성의 법칙에 충실하게 따르면 최초의 덕德으로 되돌아가 같아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충만(=텅 비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해지니 그것을 대大라 하고 그것은 마침내 고요해 질 것이다. 고요해 지면 천지와 하나가 되어 합일이 이루어지니 마치 어리석고 어두운 듯 한데 이를 현덕玄德이라 한다. (『장자』 천지天地)
이를 테면 현덕이란 무無로부터 처음으로 나타난 덕德의 세계로 되돌아간 상태로서 고요하고 어둑해 보이지만 완전한 상태라는 것이다. 『장자』에서는 이것을 잃게 되어 마침내 천하가 혼란스러워 졌다고 판단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파멸의 날을 라그나로크(Ragnarok)라 부른다. 다른 신화와는 달리 북유럽 신화의 특징은 신도 죽는다는 것인데 북유럽신화의 주신主神인 오딘이 죽으면서 파멸의 날이 시작된다. 파멸의 첫 번째 전조는 핌불베트르(Fimbulvetr), 즉 극심한 겨울이다.(북유럽다운 발상인데 극심한 기후변화는 예나 지금이나 파멸의 전조로 해석되는 모양이다.) 두 번째는 늑대의 시대인데 형제, 친구, 혈육 간에 서로 죽이고 죽는 혼란의 시대다.(2023년 대한민국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세 번째는 해와 달이 없는 어둠의 시대가 되고, 네 번째는 수탉과 개들이 짖으면 지옥이 열리고 마침내 대홍수가 일어나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정의의 황금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Davidson, H. R. Ellis, Gods and Myths of Northern Europe. Penguin Books. 1990. 참조) 기독교적 종말신화(아마겟돈)에 북 유럽 특유의 문화가 혼합된 신화다.
2023년 8월의 대한민국, 최근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보니 갈수록 사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가르치는 본질이 아닌 문제로 제도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압박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일이나 이유 없이 타인을 공격하고 죽이는 일이 정상적인 상황은 분명 아니다. 우리 사회를 통제하는 거대한 윤리의 한 축이 무너진 느낌이다. 원인이야 말 할 수 없이 많지만 그렇다고 구체적 지점을 말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 지금의 상황이다.
『장자』 이야기처럼 처음으로 되돌아가 회복하거나 또는 북유럽신화처럼 완벽한 파멸을 겪고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회복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파멸도 아닌 지지부진 상태가 지속될 것 같은 불안이 있다.
과연 또 다른 해법은 없는 것일까? 『도덕경』에도 『장자』에 등장하는 현닥‘玄德’이라는 단어가 있다. 『장자』에서 ‘현덕玄德’은 ‘현덕玄德’에 대한 상황 설정이었다면 『도덕경』에서 ‘현덕玄德’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에 가깝다.
10장, 51장에 있는 현덕의 설명은 흡사하다. 다만 10장에서는 도道라고 부르지 않고 51장에서는 도道라고 주어를 정하고 이야기하는 차이가 있다.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지축지生之畜之. 생이불유生而不有 위이불시爲而不恃 장이부재長而不宰, 시위현덕是謂玄德.”
“낳고 키워준다. (하지만)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베풀어도 의지하지 않으며 성장하여도 주재하지 않으니, 이것을 ‘현덕(玄德)’이라 한다.” (10장 일부)
“道 생지生之, 축지畜之 장지長之, 수지遂之 정지亭之, 독지毒之 양지養之, 복지覆之. 생이불유야生而不有也 위이불시야爲而不恃也 장이부재야長而不宰也. 차위이현덕此之謂玄德.”
“도는 낳아 주고 길러 주며 키워 주고 이루어 주며 안정시켜 주고 성숙시켜(毒의 뜻 중에 기르다는 의미도 있음) 주며 돌봐 주고 덮어 준다.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베풀어도 의지하지 않으며 성장하여도 주재하지 않으니 이것을 ‘현덕(玄德)’이라 한다.” (51장 일부)
이를 테면 『도덕경』의 ‘현덕玄德’의 상황을 현재의 상황과 견주어 보니 현재 우리는 현덕을 잃어버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혼란스러운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현덕을 잃은 것이 중요한 원인인데, 현덕을 잃은 원인은 바로 기득권으로 자처하는 자들의 끝 없는 소유욕이다. 그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배하려 하고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편을 갈랐다. 뿐만 아니라 베풀지도 않으면서 간섭하고 훼방하려 하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어려워졌다. 또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 제한하고 금지하여 기득권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한다. 그 결과가 이 혼란의 여러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노장이 살던 시대나 지금 시대나 세월이 흐르고 공간이 달라져도 살아가는 모습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