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교육평론가)
“이렇게 적절한 내용의 정책을, 이렇게 부적절한 방식으로 내놓다니!”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배제한다는 발표를 접하고 든 생각이다. 킬러 문항이란 지나치게 길고 어려운 지문을 제시하거나 과도하게 꼬아놓은 문항을 뜻한다. 이런 걸로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을 측정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여러 교육 관련 단체들로부터 ‘타당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변별력’을 위해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국 수능과 유사한 미국의 SAT나 일본의 센터시험에서는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해도 이토록 ‘나쁜 방식’으로 내놓아도 되나 싶다. 수능을 불과 5개월 남겨놓은 시점에 불쑥 발표한 것, 출제를 책임지는 교육과정평가원장을 경질해버린 것이 수험생들을 동요시켰다. 메시지가 ‘학교 수업 내 출제’에서 ‘교과과정 내 출제’를 거쳐 ‘킬러 문항 배제’로 변경된 것도 문제였다.
사교육이 경감될지도 의문시된다. 대입 사교육을 좌우하는 요인들을 인수분해해 보면 ‘구조적 요인’으로 대학서열(학벌)과 소득격차(전공)를, ‘기술적 요인’으로 전형요소의 복합성과 난이도를 꼽을 수 있다. 물론 구조적 요인의 비중이 더 크지만, 난이도와 같은 기술적 요인도 분명히 사교육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킬러 문항을 없애 난도를 낮추면 사교육이 조금이라도 줄지 않을까?
문제는 출제진이 킬러 문항을 배제하면서도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요구를 받게 된다는 점이다. 변별력 요구의 핵심은 정시가 아니라 수시다. 정시는 주로 수능 점수 100%로 선발하는데, 대학마다 동점자 처리 규정을 정교하게 만들어놓았기에 쉽게 출제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반면 수시에서는 수능 최저학력 기준이 석차등급으로 제시되는데, 과목별 만점자가 4%를 넘으면 한 문항만 틀려도 2등급이 되고, 만점자가 11%를 넘으면 한 문항만 틀려도 3등급이 된다. 킬러 문항이 없어져 과목별 만점자가 양산되면 한 문항만 틀려도 등급 미달로 수시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늘어 불만이 높아지게 된다.
킬러 문항은 수능이 쉬워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과거에는 전 과목 만점자가 나오는 해가 드물었는데, 이명박 정부 후반기인 2012학년도에 느닷없이 30명이 나왔고, 이 경향이 상당 기간 지속됐다.
입학사정관제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수능 비중을 낮추고 사교육비도 경감할 목적이었는데, 의미심장하게도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이때도 장관이었다. 출제진 입장에서는 이런 와중에 ‘과목별’ 만점자가 양산되는 것은 막아야 하니, 전체적으로 쉽게 내되 킬러 문항을 섞는 방향으로 출제 방식을 진화시킨 것이다. 킬러 문항은 이처럼 수능에 대한 상충하는 요구들의 타협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킬러 문항을 배제하면? 출제진은 (킬러 문항을 제외한) 평균 난도를 높여야 한다. 그러니 사교육 경감은 어렵다. 킬러 문항 배제로 인한 사교육 경감 효과가 나머지 문항들의 난도 상승으로 상쇄될 테니까. 근본적으로 사교육 경감, 킬러 문항 배제, 과목별 만점자 제한이라는 세 가지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윤석열 정부의 실수는 이러한 맥락을 짚지 않은 채 ‘킬러 문항 배제’를 성급히 외친 것이다.
해결책이 있기는 한데 올해 바로 시행하지는 못한다. 석차등급을 폐지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표준을 따르는 것이다. OECD 35개국을 조사해보면 33개국에 공인시험 형태의 대학입시가 존재하는데, 석차등급이나 표준점수와 같은 상대평가 지표를 쓰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대부분 원점수 및 등급(석차등급이 아닌 절대평가 등급)을 쓰고, 미국과 튀르키예는 균등화 변환점수(scaled score)를 쓴다. 상대평가 지표를 활용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과목 선택의 합리성과 형평성을 해친다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경향신문 지난해 12월3일자 칼럼 ‘상대평가, 어떻게 물리·경제를 죽였나’와 올해 2월18일자 칼럼 ‘수능 표준점수가 곧 차별이다’를 참조하길 바란다)다. 미국의 SAT가 상대평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SAT 변환점수 산출 방식은 비공개지만 선택과목들의 변환점수 평균치가 제각기인 것을 보면, 적어도 상대평가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만점자(200~800점 중 800점) 비율도 과목에 따라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만 입시에서 상대평가 지표들을 활용할까? 한마디로 교육과정평가원의 ‘면피’를 위한 것이다. 선택과목들의 난이도를 고르게 조절하지 못하면 과목별 유불리가 나타나 출제진이 비판받게 된다.
그런데 원점수는 아예 알려주지 않고 상대평가 지표만 기계적으로 매겨주면, 과목별 난이도가 아무리차이나도 출제진은 비판받지 않게 된다. 이것이 선택과목이 본격 도입된 2005학년도 수능에서 완성된 ‘적폐’다. 한국의 교육평가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언급하기를 꺼린다. 선후배 네트워크와 크고 작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작은 집단에서 이런 문제를 드러내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카르텔’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