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의 교육단상/질문하는 학교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6.04 22:26 | 최종 수정 2023.06.06 20:42 의견 0

사람은 밥으로만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삶은 강의나 연설이나 설교가 아니라 대화입니다. 대화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를 상정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방식으로, 화자와 청자의 의사소통에서 핵심은 질문입니다. 고대의 철학책들이 대개 질문과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까닭이요,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의 공부법, 즉 공자의 문답법, 예수의 비유법,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모두 질문에 기초한 교육방법론인 것도 이런 연유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학습법인 하부르타도 질문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랫동안 주입식 암기 교육풍토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나라 학교에서 질문은 권장은커녕, 추방되다시피 했습니다.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이 학교를 지배했습니다. 교회와 절에는 설교(설법)만 있습니다. 거리는 목소리 큰 사람들의 연설로 가득합니다. 질문과 토론이 없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는 것이 토론회나 청문회가 되었습니다. 호기심과 의심과 의문에서 시작하여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생략된 채 권위자가 제시한 정답을 따라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실관계의 검증 없이 자기주장만 반복하는 이른바 ‘뇌피셜’이 대세가 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주류 언론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끔 질문과 관련하여 민원이 발생합니다. 질문을 하려고 하는데 교사가 질문을 안 받는다거나 못하게 한다고, 질문하는 것을 교사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를 합니다. 질문을 막는 교사가 과연 있을까 생각하지만, 이런 항의는 실제 일어납니다. 한 다리 건너 두 다리라고 그 행위의 맥락 속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전해 듣는 것만으로 정확하게 문제 상황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생이 어떤 의미로, 어떤 태도로 질문을 했는지, 교사의 반응이 질문에 대한 것이었는지, 부적절한 반응이었는지 아닌지, 학생은 상황을 부모님에게 정확하게 전달한 것인지, 전달받은 부모님은 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인지, 이것을 전달받은 사람으로서는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것들과 관계없이 우리는 질문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선 질문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육이 삶과 앎의 탐구라면 호기심과 질문을 끊임없이 진작시키는 것이 교육의 기본적인 과업입니다. 교육과 공부와 학문의 세계는 질문의 문門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호기심과 질문이야말로 삶을 경이롭고 풍부하게 만듭니다. 둘째,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질문(발문)의 달인이 되어야 합니다. 폐쇄적인 질문보다는 개방적인 질문을, 수렴적인 질문보다는 확산적인 질문을, 사실보다는 가치를 다루는 평가적인 질문을 많이 해야 합니다. 셋째, 학생들 스스로 질문을 조직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질문을 할 줄 알아야 답을 찾게 되고, 관련 정보를 정리할 수 있으며, 공부의 순서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번 질문 기회를 받은 한국 기자들이 끝내 질문을 하지 못했던 일 기억하시죠? 질문과 탐구에 약하고 암기와 받아쓰기와 베껴 쓰기에 익숙한 우리 언론과 교육 현실을 드러냈던 참담한 사건이었습니다. 지금은 질문을 전문으로 하는 코치와 같은 직업이 생겨난 시대입니다.

교육의 혁신은 결국 ‘생각하는 교육’으로의 전환 아닐까요? 교육은 단순히 과거의 지식 전수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현실과 미래세계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게 안 되면 우리는 선도자first mover가 아니라 잘해야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의 질문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질문할 수 있도록 허용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선생님 스스로 좋은 질문을 끊임없이 해주세요. 예전에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의도를 알고 화를 내셨던 분도 계셨고, 모르는 척하면서 멋지게 풀어서 아이들의 인정을 받는 분도 계셨습니다. 행여 예기치 않은 아이들 질문에 충분하게 대답을 못 하면 또 어떤가요? 불확실한 건 더 알아보고 공부해서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요? 공부와 질문에 대해서 우리 교사들부터 좀 더 개방적이고 우호적이고 쿨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학교는 질문이 살아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현실은 이론과 크게 다릅니다. 교육이론과 실천이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교육의 실천과 방법에 대한 연구가 교육이론이지만, 모든 상황에 두루 딱딱 들어맞는 만병통치 식 교육이론은 없습니다. 존 듀이나 피아제가 우리 교실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 순간순간 일어나는 교육 문제에 대해서 만능 해결사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사에게는 택트tact가 필요한 것입니다. 택트란 교육적 문제 상황에서 교육적 감수성으로 대처할 수 있는 순간적 능력을 뜻하는 말로, 교육적 기예, 또는 기재機才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순간순간 선생님의 경험과 직관이 필요한 노련한 기술입니다. 가르치는 일을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유이지요. 태국 영화 <선생님의 일기>에서 기차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에게 수상생활만 하고 자란 아이가 멀뚱히 쳐다보며 기차가 뭐냐고 질문하자, 선생님이 순간적으로 여러 배를 연결해서 동력이 달린 배로 끌어가는 장면을 직접 시연해서 보여줍니다. 열역학과 동력에 대한 설명을 이론이 아니라 택트에 의지해 설명한 것이지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왜? 왜? 왜?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무런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그건 왜 그런데요?” 하고 질문할 수 있도록 ‘질문하는 학교’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수백 개의 질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한 번 읽어보시길. 이름하여 「질문의 책」.

"왜 나뭇잎들은 떨어질 때까지/ 가지에서 머뭇거릴까?/그리고 그 노란 바지들은/ 어디다 걸어놓았을까?/ 가을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건 사실일까?/ 아마도 잎 하나의 흔들림이나 우주의 움직임?/ 땅 밑에는 자석이 있나/ 가을의 형제 자석이?/ 땅 밑에서 정해진 장미의 약속은 언제인가?/(74)"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전종호 주필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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