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샘의 김상천의 문화시론/리뷰란 무엇인가?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5.30 06:46 의견 0

'리뷰review'란 무엇인가? 왜 리뷰인가?

늘샘 김상천

문화의 패턴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듣기문화, 읽기문화에서 쓰기문화로, 나아가 비평의 일상화로. 잘 알다시피, 듣기문화는 신을, 외부를, 객체를 전제하고 있다. 이 신의 말씀을 실어나르는 사자가 바로 시인계급이었다. 그러나 이성의 힘으로 신을 밀어내면서 인간이, 내부가, 주체들이 역사의 주도적인 계층이 되었다. 그러니 여기, 인간의 시대를 연 주도적인 계층이 된 사람들이 바로 저 프랑스 혁명의 삼부회의(귀족, 승려,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주인공 부르주아지 아닌가. 그들과 함께 지식 계몽을 앞세워 세계를 호령한 이들이 근대의 천재적인 작가들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 키보드에 기초한 글쓰기 체제keyboard-based writing system의 전자문화에서 작가의 존재는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글쓰기가 더이상 작가의 전유물도 특권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글을 쓰는, 아니 저 자가농산물을 판매하는 농부조차도 멋진 글로 자신을 포장해야 먹고 살 수 있듯이 누구나 글을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대중적 글쓰기 문화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글쓰기 문화가 일상화,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근대의)작가의 소멸을, 주체의 죽음을, 모더니즘의 종말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제 본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에뀌르튀르écriture' 논쟁의 불을 당긴 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문제적 문건 '저자란 무엇인가'-늘샘이 보기에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만큼이나 중요한 논쟁거리를 담고 있는 역사적 문건이다-의 저자 기능과 관련된 개념이다. 거기, 역사적 문건의 서두에서 푸코는 묵시적 전언을 흘리고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뭐 인자 비평 민주주의 시대가 되었으니, 그러니 뭐 저자의 시대는 종언을 맞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오늘 근대 작가가 쓴 주류 형식인 소설이 퇴조decline하고 대중적인 형식의 에세이가 새로운 주류로서 헤게머니를 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만 해도 1980년대 저 '광주'를 전후로 6,70년대 이후 지하에서 꾸준하게 상승해오던 대중적 성격의 민중문화가 수면으로 박차올라 전면화 되면서 민주화가 한강의 기적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당연 중요한 역할을 한 대중들이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하먼서 저 억압을 난타하는 자유의 종소리처럼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을 비롯 다양한 형태의 수기, 일기, 편지 등과 간단한 댓글에서 시, 소설에 대한 단평, 비평에 대한 비평 메타비평에 이르기까지 대중서사 주체들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시기, 김명인의 문제적 문건 '지식인의 위기와 새로운 민중문학의 구상'에서 볼 수 있었듯이 지식인은 종언을 고했다. 단적인 예로, 저 80년 광주 당시 마이크를 잡은 것은 이름 모를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1980년을, 특히 저 '68에 비견되는 87년 민주화 대투쟁을 기점으로 한국사회가 근대사회에서 탈근대사회로 진입하는 역사적 변환에서 목소리의 주체 또한 함께 변환하먼서 형식 또한 변하였다.

1960년대 국제도시 파리에서 '저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달고 그동안의 작가의 역할에 의문을 달고 당시 논의에 참가한 탈근대적 지성들(푸코, 라캉, 루시앙 골드만, 캉디약, 울모 등)의 공동전제가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무슨 상관인가'였던 것도, 이것이 '68민주화와 관련된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글쓰는 대중서사, 대중평자시대다.

대중서사, 대둥평자시대의 화두가 담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담론, 디스꾸르는 개인 체험으로서의 부르주아의 일방적인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담론은 그 사회성을, 그 대화성을, 그 상호성을 본질적인 모럴로 한다. 지식이 아니고 설명이 아니다 담론은 공동의 이슈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저자로서의 작가의 기능을 협소하게 볼 단계는 아니다 그들은 사계의 권위자이기 전에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먼 다시 전문가가 쓴 저서는 모두 신성시되어야 하는가? 가령, 전문가가 쓴 저서라도 오늘 오류로 밝혀진 저서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 보편적이고 사회적이먼서 공동이익과 관련된 성격으로서의 담론의 의의가 있고, 이 담론을 실현시키는 대중적 목소리의 한 형태로서의 서평의 존재의의가 있다.


서평은 단순한 독후 감상(문)이 아니다. 성숙한 성인의 글쓰기다. 책읽기는 서평으로 마무리된다. 아니, 서평을 통해 극복된다. 가령, 하나의 서곡overture으로서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는 훌륭한 서평 쓰기의 교본이자 그대로 <자본DasCaputal>의 전조로서의 하나의 세계적 전망을 드러낸 고전적인 사례에 속한다. 그는 결코 혼자된 것이 아니다.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등 서구의 경제학 선구자들의 저서에 대한 탁월한 비판적 요약물이자 헤겔에 예리한 변증법적 논평을 통해 그는 독창적인 세계의 지도급 사상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헤겔에 대한 비평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는 말한다 "정신현상학, 이것은 헤겔 철학의 진정한 탄생지요 비밀이라고..." 그러먼서 그의 관념론의 한계를 보기좋게 전복시킨다 뭐 좋은 서평이란 이렇게 훌륭한 비평인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글쓰는 대중서사시대, 기본적으로 그동안 문화의 객체로 소외되었던 독자가 '나도-작가'가 됨으로써 작품은 특수한 재능을 타고 난 천재만이 쓰는 것이 아니라는 모더니즘의 종말로서의 탈신화적인 계기와 더불어, 서평쓰기는 대중독자들이 소외된 문화객체에서 문화주체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주역임을 확인시겨주는, 그리하여 지금 이 시대는 우리에게 나 또한 하나의 애널리스트로서 무엇(신)에 대한 맹목적 추종도 아니요. 무엇(천재)에 대한 일방적인 외경만도 아닌 '그 무엇(텍스트)에 대한 무엇(평가)'으로서의 메타 비평으로서의 대중평자시대가 되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공감이지 지도가 아니다

난 그렇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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