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호 주필의 교육 단상 - 아이들의 상처

- 어린이날에 아이들을 생각하며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5.05 09:03 | 최종 수정 2023.05.06 11:12 의견 0
영화 가버나움

요르단 빈민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가버나움>은 어린이의 시각에서 삶의 절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 끼를 해결하기 어려운 빈곤과 절제하지 못하는 부모의 출산과 인신매매와 가까운 결혼제도와 불법체류와 난민 문제들이 빼곡히 등장합니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삶은 대책 없는 정글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문제의 근원이 출생 신고조차 하지 않은(실제로는 하지 못한) 무책임한 부모라고 생각한 아이는 제 부모를 법원에 고소합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다룬 영화는 많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의 시각을 앵글로 잡은 영화는 드뭅니다. 영화를 볼 때마다, 보는 장면 장면마다 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폐부를 콕콕 찌릅니다.

이게 남의 나라만의 이야기일까요? 아이들의 슬픔 또는 절망이 이런 중동지역이나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승자독식과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의 정글 자본주의가 빠져나갈 수 없는 삶의 막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문제의 성격은 조금 달라도, 우리 아이들도 영화 속 아이의 절망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틀에 한 명씩 아이들이 죽습니다. 손목에 칼을 긋는 아이들은 많습니다. 우울증 약을 먹거나 정신과를 찾아가는 학생들은 부지기수이고, 아동학대 사례도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조사해보면 아이들 고민의 상당 부분은 성적과 진로에 대한 것들입니다. 제가 만난 아이들 중에서 공부를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는 사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만 있었을 뿐입니다.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많은 좌절과 어려움을 겪고 후유증을 안습니다. 정신과 의사 김현수는 이런 것들을 ‘공부 상처’라고 부르고, 관계, 돌봄, 과잉, 역할, 노력, 평가, 실행 7가지 상처로 나누고 있습니다(<공부상처, 에듀니티>). 관계 상처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부모, 친구, 교사와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결과적으로 ‘공부 파업’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돌봄 상처는 학생의 삶이 먹고사는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만성적인 학습경험이 부족해지는 ‘학습경험 결핍’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학습량 자체가 너무 적기 때문에 공부하는 방법 자체를 배우지 못합니다. 과잉 상처는 학습 과정에서 지원이 지나쳐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많은 자극에 반응하다 보니 오히려 피로감을 느껴 공부에 질리고 마는 ‘만성학습피로증후군’이 되고 맙니다. 역할 상처는 부모가 학습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모니터링하고, 결과 평가를 대신해 줄 때 나타나고, 스스로 할 일이 없는 학생은 자신의 학습 목표를 잃게 되어 ‘목표 결핍’이 일어납니다. 노력 상처는 공부를 잘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성과가 나지 않을 때 생기는 상처로, ‘엄마, 나는 안되는가 봐’라고 써놓고 코피 흘리고 엎어진 학생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자연히 ‘자신감 결핍’으로 이어지고, 시험 볼 때마다 어딘가 아픈 시험 증후군 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평가 상처는 지나친 목표와 기대 설정으로 부모의 기대감을 맞추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감에서 오는 것을 말합니다. ‘기대 부담’ 같은 것입니다. 실행 상처는 학습 과정을 하나하나 관리하려고 하는 경우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는 경향성을 뜻합니다. 학습과정에서 지속적인 실패나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 ‘실행 결핍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라 그런지 무슨무슨 증후군으로 병명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 이름의 타당성은 잘 모르겠으나 이러한 증상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공부 상처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관계에서 오는 복합적인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의 기원은 부모이기도 하고 교사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사회제도이기도 하고 본인 자신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한 공부 상처도 한 개의 독립변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요인이 서로 얽혀서 때로는 독립변인으로 때로는 매개 변인으로 작용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학교는 예전에는 없던 전문상담교사(상담사), 보건교사를 배치하여 대응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따라서는 교육복지사를 두기도 하고, 앞으로는 선진국처럼 학교 의사가 상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세상이 복잡해졌다는 뜻이고, 복잡한 세상에서 아이들의 삶도 더 복잡해지고 더 상처가 쌓여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심리적으로 더 섬세하게 아이들을 대하고, 아이들의 의견과 인권을 고려하는 등 정치적으로 좀 더 민감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식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큰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 한국판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를 만들어 준비해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를 태어나게 한 이유로 부모를 고발한다’는 한 아이의 절규가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강한 의문이 자주 드는 시절입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전종호 중앙교육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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