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임화(9)/ 김상천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1.02 10:46 의견 0

6. 허균(許筠)

허균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살다간 조선 중기의 탁월한 문인으로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자입니다. 자, 왜 우리는 조선(철)학의 내재적 기원의 하나로 또한 허균을 다루지 않으먼 안 되는가. 그것은 과연 그가 유명론적 전통에 있어서의 조선학의 문제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문제적이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시대의 공기와 시간의 압력이 요구되었으니, 그것은 그가 서경덕의 기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아버지 허엽의 아들로 또한 방외문인 이달의 문풍을 이은 것도 있으나 그는 ‘호민豪民’ 의식을 지닌 뛰어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는 점입니다. 뛰어난 지식인은 스스로의 자각과 더불어 시대현실의 모순에 대한 남다른 촉수를 지닌 자입니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을 겪으먼서 마주하게 된 조선의 현실은 어떤 것이었는지... 임진왜란은 당쟁이 한창이던 가운데 겪은 외침이었습니다. 자, 나는 여기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 당쟁사를 열거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먼 외부의 시선으로 보먼 매우 단순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발기발이 집안망친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전후 조선이 망하기까지 끈질기게 이어진 징글징글한 조선당쟁사를 바라보는 당시의 속담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실질적인 구성체인 민중들은 당쟁을 그들만의 싸움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이발기발理發氣發'이라는 언표는 당시 인구에 회자되었던 당쟁사를 상징하는 기호입니다. <주역>에서 시작된 음양론이 이기론으로 철학적 지위를 얻으먼서 역사에 정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송의 주자 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소중화라는 자부심을 지닌 조선에 들어와서 분화를 일으키더니 조선의 철학이 일대 꽃을 피운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 속담처럼 민중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가 먼저 발했느니(이황, 남인) 기가 먼저 발했느니 (이이, 노론) 하는 치열한 이론투쟁은 사실 민중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공리공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배자들에게는 결코 공리공담이 아닌 분명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의의가 있는 정치담론이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저 번쇄한 관념 논쟁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먼 저 이기론의 이른바 '이발기발'이라는 디스꾸르discourse가 내포하고 있는 서브스텐셜한 실질적 의미로서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인지...하나의 정치경제학으로서의 관념의 이데올로기(성)을 최초로 다룬 역사상의 철학자는 마르크스/엥겔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관념이라는 것은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경제적 현상의 이데올로기적 결과라는 것으로, 정확하게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그들의 의견에 대한 긍부를 떠나 이것은 참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금칼 같은 지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먼저 남송의 주자朱子가 왜 이기론을 통해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성리학을 완성했는지...주자가 이기철학을 통해 중국의 봉건체제에 크게 기여한 동양 최고의 철학자임에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저 서구 중세 스콜라철학에 있어 토마스 아퀴나스를 최고의 철학자라는 평가와 대소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먼 토마스가 모든 개별화의 근거를 보편적인catholic 질료에서 찾듯이, 동양의 토마스 역시 모든 개별자氣의 근거를 보편자理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서양 중세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종지를 대변하는 ‘이理’와 ‘가톨릭catholic’은 같은 말인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왜 성리학이든 신학이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론으로 시대를 분식하는 이데올로그가 되었을까 하는 점인데, 여기서 우리는 언어라는 게 결코 중립적 일 수 없음을, 그러니까 언어는 항상 그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는 당파성을 지닌 이데올로기 기호임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주자는 이理를 우선시하고 기氣를 후순위理先氣後로 배치했는데, 이것은 위계적인 의도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위계적인 질서가 요구되었던 것은 당시 남송이 북으로 오랑캐(후금)와 대치하고 있고, 또한 당시 강남 지역의 경제발전에 따른 형세호(대지주)들의 이익을 현실적으로 옹호하고 소작인들의 계급적 위치를 호도하기 위한 이념적 대응과 관련된 것으로 주자의 이기론은 결코 관념론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북쪽의 게르만(오늘의 독일)이 봉건 영주들이자 사제들의 안정된 질서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이단이 발호하는 시대에 정통신학으로서의 신학적 교조주의가 요구되었던 당대의 상황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정치권력을 거머쥔 봉건영주들이 수도원장으로 종교권력을 함께 지니게 된 것은 그들이 보기에 종교권력은 반대급부 없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던 것으로, 그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죄악의 근거지였던 조선후기의 서원書院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 정치권력과 결합하게 되먼서 수도원이 타락(보카치오의 <데카메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우리의 경우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이발기발’이라는 조선적 이기논쟁은 조선적 경제 상황이 낳은 조선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는 점입니다. 자, 그렇다먼 조선적 경제 상황은 또 뭐란 말인지...그것은 뭐 이런 것입니다. 즉 이이를 종조로 하는 서인에서 분화된 노론 권문 세력들은 넓은 지역의 토지를 관장하먼서 세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하먼 이황을 종조로 하는 동인에서 분화된 남인들은 주로 경상도(영남 남인) 또는 경기 주변(기호 남인)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며 띠를 두르고 있었다 볼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주로 경기도 주변에 한정되었던 왕토의 분봉과 분급이 점차 확대, 세습, 겸병화하먼서 경기 이남, 충청 호서지역은 물론 황해도까지 왕토가 아닌 땅이 없는 조선사회에서 농민의 전답이 그들의 세습적인 사유지로 전락-신소설 '구마검'을 보먼 한양노론이 운영하는 오늘의 평택 "진위 땅에 있는 농막"이 소개되어 있고, '귀의 성'에는 또한 "내포와 황해도에서 올라오는 추수섬"이 중요한 수입원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고향>에는 노골적으로 "서울 사는 민판서"라고 노론세력들이 전토를 무섭게 잠식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벌써 이들의 토지 세습과 겸병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하게 되먼서 신구세력 간에 전토田土를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 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그래 우리가 여기서 다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당시 조선사회의 신구세력, 남인과 노론 간에 서원을 근거로 갈수록 점화되고 있는 당쟁과 자신들의 존재근거를 외화시킨 이기철학도 사실은 토지세습과 겸병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 논쟁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발을 대변하는 남인 이황은 마치 신흥부르주아세력을 대변하는 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관념적 이상으로서의 ‘주리主理論’에 목을 매었던 것이요, 기발을 대변하는 이이는 기존의 권력을 대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처럼 현실적 이념으로서의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 이런 사정은 더욱 견고해지먼서 갈등은 노골화되고(인조반정) 이념 또한 더욱 폐쇄적이었으니, 특히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우암학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그나마 이황, 이이라는 종조들에게서 볼 수 있는 대화 가능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오직 '유리론唯理論'만이 왕자의 대접을 받는 닫힌 사회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임란 이후 조선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에 전후 복구사업은 국가의 핵심사업이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다행히 상당히 긍정적인 변화를 수반하였습니다. 우선, 직파법直播法이 이앙법移秧法으로 바뀌면서 농업생산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또 2모작이 가능하고 견종법畎種法이 발달함에 따라 농지가 확대되고 수확량이 증대하는 등 이른바 ‘광작廣作’이 크게 보급되었습니다. 이에 부농이 출현하고 농업도 점차 상업농으로 변화하고 부의 집적에 따라 잉여농산물이 쌓이고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였습니다.
지주-전호의 관계도 많이 헐거워졌습니다. 타조법打租法에서 도조법賭租法으로 도지를 주는 방법이 개선되자, 다시 말해 전호가 수확량의 2분의 1을 지대로 전호田主에게 내던 것을 전호佃戶가 미리 정한 양의 수확량을 내면 그만인 새로운 지대 납부 방법이 도입되자 전호(소작농)의 신분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이는 전호가 봉건적인 신분의 고리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신분이 될 수 있음은 물론 자본주의 발전의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전주와 전호 사이라고 볼 수 있는 주인과 종의 얘기로, “우리집 배추보다 너의 집 배추가 더 여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대화가 실려있는데, 이게 바로 이기심입니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인간 본연의 이기적 욕망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발전된 것(아담 스미스, <국부론>)이라고 볼 때, 조선 후기사회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토대를 서서히 갖춰간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농업생산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지역경제의 번성은 자연 사회계층의 변화, 즉 신분제를 동요시켰습니다. 농민들은 이제 전주와 전호, 그리고 임금노동자로 분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전주-전호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켜 항조운동이 일어나고 때로 민란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부농들은 양반으로 신분을 세탁하는가 하면 양반은 이제 ‘한 푼짜리도 못되는 그놈의 양반’으로 전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신분의 이동은 급기야 ‘종모법從母法’이라는 제도로의 변천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부모 한 쪽 중 어느 한 쪽이 천인이면 자식은 무조건 천인이 되었던 양천제兩賤制가 예송논쟁의 와중에서도 어머니의 신분만을 따르는 종모법에로의 변화는 모두 사회경제적 변화의 결과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변화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습니다. 천주교의 전파와 동학의 발생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역사의 강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거센 변화의 조류 앞에서 이를 역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노론 세력들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결코 그들의 이익과 함께할 수 없는 현실적 모순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의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학사상이었습니다. 서인의 종주 이이의 우파 김장생, 김집의 예학사상을 이어받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비롯한 보수 세력들은 현상유지를 가장 기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원을 근거지로 예학禮學과 보학譜學을 더욱 장려하고 강권하였습니다. 예학은 성리학에 기반한 예법 질서, 곧 삼강오륜三綱五倫 같은 도덕 윤리로 현실을 통제하기에 유효한 규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장유유서長幼有序’이자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정치논쟁이 바로 ‘예송논쟁禮訟論爭’이었습니다.
지리한 예송논쟁을 보자면 참 치사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효종은 차남으로 적통이 아니었으니 장례에 3년 복이 아니라 1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식으로 아닌 명분을 들이대서는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고자 하는 노론의 꼼수에 우리는 그냥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대체 현실적으로 왕 노릇한 게 중요한가요 차남이었다는 게 중요한가요. 그러나 당시는 노론이 지배하던 사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리학의 말단적 형식논리가 얼마나 현실을 박제화시킬 수 있는지를 봅니다. 보학 또한 가부장 중심의 종법宗法질서를 합리화하기에 효과적인 이념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족보族譜’입니다. 다시 말해 예학과 보학은 기득권을 쥔 노론 중심의 배타적인 양반사회의 질서를 유지, 강화하는데 매우 적절한 도덕적, 현실적 이데올로기적 통제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조선의 이단아, 허균을 만납니다.

"그늘진 웅덩이
들여다보니 까마득히 깊어라
그윽한 물안개 굽이굽이 휘돌아
저 아래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산다는데
깊디깊은 그 속에 또아리 치고 있다고들
때로 희디 흰 숨결 토해낸다던데
자욱한 안개 넘치고 흘러넘쳐
언제쯤 천둥과 비를 일으키려는지
언제쯤 신선의 요대로 날아오르려는지"
-허균의 '명연鳴淵' 전문, 이진 풀이

여기, 그늘진 곳에 깊이 모를 웅덩이가 하나 있습니다. 검고 푸른 빛이 감도는 그곳에는 물결이 어리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양이 분명 천년 묵은 이무기가 또아리 치고 있지 않고서야 저리 깊을 수가 있을까. 그늘진 것도 서러운 일인데 저래 깊어서야 그러니 이무기는 어떤 놈인가. 필시 설운 놈이 아닌가. 그래 있거나 말거나 나도 서러운 놈이기는 마찬가지...그래 화자는 연못이 운다고 했을 것입니다. 대체 무에 그리 서러운 것인가. 그는 뭐 스스로도 '교산蛟山'이라고 했거니와, 자신을 교룡이라고, 저 그늘 지고 깊고 어두운 곳에 사는 이무기 같은 민생들과 얼자孼子들과 이땅의 약자들인 타자들과의 동류의식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이 땅의 그늘진 곳에 처해 이무기처럼 또아리 치고 살고 있는 "타자, 그들은 나다!" 라고 선언한 셈이 아닌가. 뭐 만적 이래 그는 조선의 노비해방론자가 아닌가.

그 또한 얼자로서 삼당 시인 이달의 제자가 아니던가. 그러나 재주 많고 능력 있는 스승이 왜 그늘진 구석을 맴돌아야 했는지...서자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지...말이야 바른 말이지 방탕한 양반꼬라지들의 문란한 성생활의 책임을 왜 자식에게 지우는지...대체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이 어찌 다르고 이걸 어찌 하늘이 주었단 말인지...대체 운명이 어찌해서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이치인지...끝간데 없이 이어지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물안개 같은 설움이 이무기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한다니...그러니 어찌 장차 천둥과 비를 몰고 날아오를 이무기가 아니것는가. 그러니 어찌 우렁우렁 결심이 서려 있지 않것는가. 그러니 어찌 비룡이 되고 싶은 장삼이사의 대명사 홍길동이 아니것는가. 억울하고 모순된 삶의 이야기를 쉽게 써서 대중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것는가. 조선 최초의 허균의 한글소설<홍길동전>과 ‘우는 연못’에는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의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허균(1569~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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