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임화(8)/ 김상천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2.12.26 11:29 의견 0

5. 세종 이도(李裪)

세종 이도, 그는 탁월한 계몽군주이자 조선 최초의 유명론자였다. 과연 그럴까 난 '조선(철)학의 기원'이라는 참으로 중대하고 지난한 이야기를 이끌고 있으니, 실제로 그러한지 나의 신중한 판단 하에 내린 평가를 해명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1, 세종 이도는 과연 탁월한 계몽 군주였나.
2, 세종 이도는 또한 조선 최초의 유명론자였나.
먼저, '탁월한 계몽 군주', 이것은 '계몽'과 '군주'와 '탁월하다'는 복합개념을 분해, 결합해야만 풀리는 명제다. 자, 그러니 계몽부터 보자.

'계몽'은 사전적으로 볼 때에 있어서는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을 말한다. 이것이 군주를 전제로 할 때는 백성을 가르쳐서 깨우치게 함을 이른다. 그러니 '훈민訓民'은 곧 조선의 군주인 세종 이도가 백성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은 임금이었음을 암시한다. 나아가 계몽은 대상적, 술어적 존재이기도 하고 주체적, 주어적 존재이기도 하다. 즉 칸트(<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의 정의에 따르먼, 계몽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종은 조선의 백성들이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길 바랬던, 그리하여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게 함으로써 ‘신민subject’에서 ‘주체subject’로 거듭나기를 바랐던 것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일용에 편하게 할 따름"이라는 말에 계몽의 주체적이고 실질적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위인이 계몽적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탁월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먼 현실은 미성년 상태를 온존시키고 백성들을 무지와 어둠 속에 가둬 놓으려는 수많은 족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고방식의 진정한 개혁을 가져오는 계몽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 지성을 과감히 사용할 줄 아는 결단력과 용기가 필요한데, 더구나 여기 결단력과 용기를 통해 지성의 칼을 사용해야 할 위치에 처한 군주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 '공적' 자유라는 지성을 사용해야 하기에 더욱 신중해야만 하고, 왜냐하먼 개혁에는 늘 수반되는 수구세력의 저항이 있어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권력층에서는 조선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동문동궤(同文同軌)를 벗어났다 하여 부당하다고 상소를 함은 무론 "지금 이대로도 좋은데 왜 바꾸냐!"는 백성들의 관행적 태도에도 과감히 맞서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 이도는 이렇게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쌓인 채 무수한 압력과 반대의 목소리가 넘침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또 한편으로는 압력을 가하먼서 새로운 문자 창조라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문자전쟁을 추진해 성공시켰으니 이를 탁월하다 하지 않으먼 그 무엇이 탁월하단 말인가. 더구나 이것은 이성계나 형제들처럼 창칼이라는 무의 힘이 아니라 문자라는 문의 힘으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언어를 통해 권력의 존립을 정당화하고, 교화의 힘으로 백성을 깨우친 일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오늘에 견주어봐도 그 비교할 수 없는 정미한 언어철학으로 문자 창조의 이론을 완벽하게 제시해 낸 점...그 중에도 '해례'를 통해 문자창조이론에 대한 근원적인 설명을 돕고 있는 중에 '자연음'으로서의 훈민정음 창제의 이치를 일원지기一元之氣라는, 즉 자연의 소리와 하늘과 땅, 인간의 발성기관을 모방한 훈민정음의 소리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불이적 기일원론不二的 氣一元論에 이르러서는 가히 한국의 문자와 이에 기반하고 있는 조선의 문화가 왜 오늘 세계문화를 주도, 선도할 수 있는 창도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 중국의 문자인 소전小篆을 모방하고字倣古篆 음양오행 등 중국의 역학에서 비롯된 성리의 자연철학을 참고했을망정, 그러나 훈민정음은 이를 더욱 '간이하게易'-한자가 214나 되는 의소(部首)와 이형들과의 복잡한 결합으로 이뤄진 것에 비해, 훈민정음은 24개의 음소로 모든 것을 해결-한 것만 보더라도 그렇거니와,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같고 다른 천지자연의 조화들을 하나의 일원적인 기운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쿵쾅거리는 문화적 긍지와 정합적 지혜가 오롯하게 담긴 문자철학서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 그렇다먼 이번에는 그가 또한 조선 최초의 유명론자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보자. 자연철학을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 하는 것으로서의 유명론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현실에 기초한 경험적이고 객관적 사실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 이도가 경험적이고 객관적으로 마주한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다르다(國之語音 異乎中國)
는 것이다. 자, 이것은 뛰어난 현실 인식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지성의 힘이다. 바로 여기,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배타적인 인식의 차이에서 개별자를 인식하는 유명론적 눈깔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중국 문자에 익숙한 특수계층은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누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그렇지 모한 대부분의 우민들은 하고픈 말이 있어도 종래에는 그 뜻을 펴지 모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니, 뭐 이것은 과연 민본에 기반을 계몽 군주로서 조선 민중이 놓인 문자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진술이다.
그리하여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해 새로이 28자를 만드니, 이것은 그야말로 계몽적 결단이라는 건곤일척의 결기가 없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니,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집현전 학사들인 최만리 일당을 감당해야 했으니, 그것은 그들의 허구를 날카롭게 쏘아본 세종 이도의 유명론적 면도날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여기 조선적 유명론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놀라운 대목으로 신하들이 그 뜻을 받아 쓴 기록은 이렇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하나의 음양 오행뿐이다. 곤괘와 복괘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이고 멎고 한 뒤에 음양이 된다. 무릇 어떤 생물이든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은 음양을 두고 어디로 가랴? 그러므로 사람의 말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가 있건마는 생각컨대 사람들이 살피지 않을 뿐이다. 이제 정음을 만든 것도 처음부터 지혜로서 경영하고 힘써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소리에 따라서 그 이치를 다하였을 뿐이다.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닌즉 어찌 하늘과 땅과 귀신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天地之道一陰陽五行而已坤復之間爲太極而動靜之後爲陰陽凡有生類在天地之間者捨陰陽而何之故人之聲音皆有陰陽之理顧人不察耳今正音之作初非智營而力索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理卽不二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이 부분은 훈민정음 해례의 '머리말' 부분으로, 과연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와 이론을 총체적이고 명료하게 설명한 종지宗旨라 할 수 있다. 난 솔직히 말해서 조선 최고 지성의 논리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무론 음양의 이치를 기초로 모음과 자음을 대응시키고 오행을 원리로 아설순치후음牙舌脣齒喉音을 갖다 붙인 것은 탁월한 상동적相同的 발상임에 틀림없으나 오늘 발달된 과학의 수준으로 보건대 오행五行으로 모든 물질의 원소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 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물, 불, 공기나 인도 불교의 4대 원소처럼 고대인의 소박한 자연철학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의 도를 음양으로 보고 이를 자음과 모음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언어적 상상력은 매우 객관적이고 현실적 의의를 지닌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먼 자연의 전기적 에너지가 음극-과 양극+으로 이뤄져 있고, 디지털 전자사회를 이루는 픽셀pixel 또한 0과 1이라는 이원적 음양 원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볼 때, 이는 현대의 자연과학적 견해에 비추어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태극의 작동 원리 또한 현대 물리학의 파동 개념으로 설명 가능하다. 어쨌든 이 글의 논리 구조를 요약하먼 아래와 같다. 모든 이치는 음양 아닌 게 없다. 말소리도 마찬가지다. 즉 이치는 둘이 아니다.

여기, 모든 이치를 음양이라는 '변화change'의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은 동양 사상의 원천이라는 <주역周易>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기호적 상징으로 '곤괘坤卦'가 음을 나타낸다먼, '복괘復卦'는 양을 표상한다. 그리하여 마치 최초의 생명체가 세포 분열을 통해 생명의 증식을 거듭하듯이, 이 곤괘와 복괘 사이를 움직이게 하는 태극太極이 작용하여 음양陰陽이 생기고, 오행五行이 작동하고, 만물萬物이 운행한다는 것이니, 이는 모든 것을 오로지 ‘존재being’에 기반을 둔 서양의 형이상학적 인식론 또는 실재론적 관념주의와 구별되는 ‘생성becoming’에 기반을 둔 동양의 자연과학적 인식론이자 유명론적 사실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음양에 의해 운행하는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말소리 또한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리하여 양-복괘-자음, 음-곤괘-모음을 기본으로 하늘과 땅으로부터 만물이 나왔듯이 음양의 조합으로 모든 문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니 뭐 '이치는 둘이 아니다(理則不二)'라는 거 아닌가. 이것은 참으로 '실제real'의 현실과 딱 들어맞는 정합적인cohesive 유명론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세종대왕(1397~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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